결혼을 지키기도, 무너뜨리기도 하는 작고 사소한 것들

by 온호류


2024년 4월 28일 일요일

드라마를 보며 (전)남편을 떠올리는 나 (남이 되기까지 D-3)



(전)남편과 우리 가족의 코끝 찡한 재회는 스치듯 지나갔고 일주일이 빠르게 흘렀다. 카페에서 맥락 없는 눈물을 펑펑 쏟아내던 나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하게 지냈다. 사실 멀쩡하다기보단 감성에 젖어있을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최종 이혼을 확정받는 법정 기일이 다가올수록 이혼에 대한 실감보단 현실적인 감각에 더 예민해져 갔다.


이전 글에서 엄마와 함께 살다 보니 자주 부딪힌다고 얘기했었는데, 남편과의 재회 후 이틀 뒤쯤 엄마랑 또 한 번 크게 싸웠다. 그러면서 빨리 독립하는 게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지금 내 재정 상태론 불가능했다. 돈은 있지만 주식에 다 물려있으니 당장 현금화하기엔 손해가 막심했다. 호기롭게 남편의 원금을 다 돌려주겠다고 했으니 주식이 원 가격을 회복하기 전엔 내 돈이라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35살, 직업 없음. 모아놓은 돈은 주식에 물려있고, 남편에게 줘야 할 돈 많음. 스스로의 현실이 직시 되면서 대학원을 그만둘 때의 당당함과 경제적 풍요로움이 그리워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주제 파악을 하고 나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그에 대한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혼 조정 중이란 걸 잊을 만큼 아무렇지 않다가도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듯 별안간 엉엉 울어버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굵은 소나기 같은 감정들, 먹구름과 같은 그리움을 몰고 오는 것은 그와 함께했던 아기자기한 일상과 그가 했던 사랑스러운 행동이 떠오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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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둘 다 뇌가 시릴 만큼 술을 차갑게 먹는 것을 좋아했다. 한겨울엔 냉장고 보다 밖의 기온이 더 낮으니 천연 냉장고라며 술을 먹기 전 창문 바깥쪽에 놓아두곤 했다. 어느 비 오는 날 남편이 퇴근하고 왔을 때, 내가 막걸리를 사 올 테니 전을 부쳐 먹자고 하면 가방에서 느린마을 막걸리 2병을 꺼내며 씨익 웃던 그의 미소. 한 병을 뚝딱 비우고 기분이 좋아져서는 엉덩이를 씰룩이며 남은 막걸리 한 병을 가지러 춤추듯 걸어가던 귀여운 뒷모습.


아직 하나도 정리하지 못한 그와의 사진들 속 활짝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볼 때, 사진을 찍어주는 그를 보며 웃고 있는 나의 모습이 너무 예쁠 때, 혹은 사진 속 내가 유난히 못생겨 보일 때, 이렇게 못생긴 나를 오래도록 "예쁘다, 귀엽다" 해준 게 고마워질 때, 핸드폰을 붙잡고 눈물을 쏟곤 했다.


우린 개그 코드만큼은 정말 잘 맞았고 우리끼리만 웃겨 죽는 유행어가 수두룩 했는데, 가끔 나도 모르게 그 유행어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추워요!"


추위를 잘 타는 내가 툭하면 춥다 그러니 그는 몸을 떠는 시늉을 하며 염소 같은 목소리로 나를 따라 했다. 그게 습관이 돼서 추울 때면 나도 모르게 그가 나를 놀리던 그 톤으로 "추워요"가 나온다. 둘만 아는 거라서 아무도 안 웃지만 나 혼자 씁쓸히 웃음 지어질 때 그렇게 서글퍼진다. 그리워진다. 싸우는 게 지겨워서 이혼하기로 했다만 그와의 즐거웠던 추억은 여전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거다.

깊이 들어가 보면 그와 싸우며 생긴 깊은 상처도 크게 행복했던 장면도 있겠지만 나를 눈물짓게 하는 건 그의 소소한 다정함과 평범한 일상 속 깔깔 웃던 기억들이었다.



IMG_5675.JPG 그가 찍어준 사진



마지막 법원 출석일이 며칠 안 남은 어느 날 저녁, 거실에 나가보니 엄마가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요즘 최고 인기인 '눈물의 여왕'이라는 드라마였다. 재벌가 막내딸 홍해인(김지원)과 평사원 백현우(김수현)가 이혼 위기를 겪고 그걸 극복하는 이야기다. 평소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 나지만 이혼과 관련된 내용이다 보니 엄마가 보고 있을 때면 자연스레 옆에 앉게 됐다.


마지막 화의 어떤 장면에서 김수현의 대사를 듣고 남편 생각이 났다. (스포 주의)

홍해인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실을 알게 된 백현우는 그녀를 향한 사랑을 깨닫게 되고 종국엔 그녀를 대신해 총에 맞는다. 드라마답게 죽지 않고 깨어나 서로를 아끼는 사이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때 둘이 나누는 대화였다.



스크린샷 2026-03-23 오후 4.38.16.png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 중



해인: 우리가 그렇게(이혼하게) 된 건 아주 큰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 거야. 마음과 다른 말들을 내뱉고 괜한 자존심 세우다가 멍청한 오해들도 만들었겠지. 용기 내서 노크하는 것보단 문 닫고 혼자 방에 들어가서 당신을 미워하는 게 가장 쉬웠을 거야. 근데 이젠 안 그래 볼 거야. 그럼 해볼 만하지 않을까?


현우: 나도 그랬어. 누가 또 당신한테 총을 쏘면 그 앞으론 열두 번도 더 뛰어들 자신이 있거든? 근데 그런 거 말고 매일 사소한 일상에서 지치고 싸우고 실망하는 건 좀 두려웠어. 또 틀어지고 어긋나고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가 없었어.



앞서 말했듯 남편을 그리워하게 하고 나를 눈물짓게 하는 것은 보통의 날들 속 작고 행복한 추억들이었다. 우리가 쉽게 이혼을 결정하지 않고 5년간 노력할 수 있게 붙잡아 준 것도 그간 적립되어 온 함께 울고 웃던 시간들이었고.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 것이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었다면, 우리를 멀어지게 한 것 또한 하루하루 조금씩 쌓여온 별거 아닌 것들이었다.


나는 백현우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남편을 대신해 총에 맞을 순 있을지 몰라도 매일 함께하는 나날을 그렇게 서로 할퀴며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 그가 불치병에 걸려 평생 수발을 들어야 한대도 난 그의 곁에 남았겠지만 계속되는 일상에서 나를 비난하고 소중히 대하지 않고 가슴 아픈 말을 쏟아내며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그런 사람과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클지라도 반복되는 좌절과 실망은 사랑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결국 둘 사이를 잡아주던 끈끈한 사랑을 헐거워지게 만든다.


그의 사랑을 식게 한 것도 하나의 커다란 잘못이 아닌 평소 쌓여온 내 무심한 태도일 거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백수가 된 나를 부끄럽다 말하는 그였기에 그런 말이 듣기 싫어서, 그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빨리 결과를 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1순위는 내 성공이지 그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표현을 못 하는 사람이라 어떤 부분에서 힘들고 답답한지 마음을 읽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늘 나에게 집중하느라 바빴고 바쁜 나를 위해 퇴근 후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겠다는 헌신적인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던져놓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그는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거고 내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렇게 하루하루 적립된 작은 서운함이 모여 그를 분노케 하고 돌변하게 만든 거겠지.


목숨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뜨겁던 사랑을 사그라뜨리는 게 꼭 쓰나미처럼 거대한 사건이란 법은 없다. 파도처럼 계속 들이치고 반복되는 서운한 말들과 실망. 잠깐 한눈팔면 무릎에서 허리까지 높아져 있는 밀물처럼 잠식되는 줄도 모르고 어느새 쌓여있는 해소되지 않는 감정들. 숨이 막히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사랑의 불꽃은 꺼진 지 오래고 둘의 관계는 예전으로 돌아가기엔 아득하게 멀어져 있다.


우린 둘 다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길 줄 몰랐고 그 대가로 전부와도 같던 서로를 잃었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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