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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살에 처음 해보는 가출

by 온호류



2024년 3월 8일 금요일

아빠랑 싸운 날. (남이 되기까지 D-54)



한 것도 없는데 벌써 금요일이다. 내가 이혼을 하든 말든, 기분이 좋든 구리든, 시간은 잘만 흐르고 세상도 무탈하게 굴러간다. 가끔은 이런 사실이 구슬프게 느껴지다가도 어쩔 땐 위안이 된다. 내가 어떻게 살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관심 없으니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도 괜찮다는 위로 아닌 위로 말이다.


아, 아무도 관심이 없진 않다. 부모님. 엄마 아빠는 나의 이혼에 대해 관심이 많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옛말에 익숙한 엄마는 화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저녁에 만나면 "연락 안 왔어?"라며 묻곤 했다.


연락은 월요일 저녁에 왔었다. 그날 점심, 분노의 카톡으로 합의 이혼을 하기로 하고 '대전 갈 때쯤 연락할게'로 대화를 마무리 지은 상태였다. 그로부터 7시간 뒤쯤 (전)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시간 날 때 전화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남편의 태도는 꽤나 수그러져 있었다. 꽤나 꼴 보기 싫은 장문의 카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중하고 미안하다며, 꼭 할 말이 있으니 전화 달라고 했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으나 듣고 싶지 않았다. 화날 땐 앞뒤 생각 안 하고, 할 말 안 할 말 다 지르고 상처 준 뒤 나중에 수습하는 참회의 말 따위에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떨어져 있을 때가 기회였다. 나중에 화가 풀리면 나도 마음 약해지니까 지금 다 질러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단호하게 말했다.


"나중에 시간 좀 지나고 하자 지금은 어떤 얘기도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아."


머리로는 헤어지는 게 맞다는 걸 알면서도 그간의 정 때문에, 연민 때문에 늘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믿어보자며 오랜 시간을 낭비했다. 더 이상의 낭비는 없어야 했다. 내가 무슨 오해를 했든, 남편의 속마음이 어떻든 간에 나와 우리 가족을 함부로 대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젠 남편의 사정이 아닌 사실을 직시할 때였다.


그에게 아픈 과거가 있고 성격적으로 나보다 더 섬세하고 상처를 잘 받는 그런 사람인 걸 모르는 게 아니지만, 그래서 나도 그 아픔을 감싸 안으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이제는 그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니까, 내가 아픈 게 먼저였다. 더는 아프기 싫어서 그를 놓기로 했고 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남편은 변명하거나 회유를 하자는 의미가 아니라며, 그동안 회피해 왔던 자기 마음을 온전히 알게 됐으니 그걸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럼 자기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고 후회 없이 끝낼 수 있을 거라며.


'후회?'


남편은 뭘 모른다. 이 순간 나의 가장 큰 후회는 좀 더 빨리 우리 사이를 정리하지 못한 건데…. 이혼에 대한 후회 같은 건 추호도 없는데 말이다.


"난 지금도 후회 없어.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앞으로 너 걱정만 해. 나도 내 걱정만 할 거니까."


이렇게 보낸 뒤 남편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사실 나 너 걱정 안 해. 미안함도 조금밖에 없고. 그걸 얘기하고 싶었던 거야."





평소 화가 났을 때 "욕먹어도 싸다, 네가 잘못했으니 하나도 안 미안하다"이런 얘기를 자주 들었던 터라 엄청 놀라운 건 아니었지만, 이런 얘길 들으니 남편도 많이 힘들었나 보다 측은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괘씸한 마음은 그다음이었다.


나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싶진 않다. 불륜이나 가정폭력 같은 극단적인 이혼 사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보통의 이혼에서는 둘 다 피해자다. 그리고 또 둘 다 가해자다. 그가 나의 힘듦을 공감하지 못했듯 나도 그의 힘듦을 알아주지 못했던 거일뿐이다. 그래서 부부간에 대화는 참 중요하다.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지 못하는 상태를 탓하지 말고 어떻게든 대화로 이해시켜야 부부 사이가 원만하게 유지될 수 있다.


그렇게 남편의 대화 신청을 거절하고 '어 그럴게'라는 남보다도 못한 냉랭한 카톡으로 우리의 대화는 종료됐다.






아빠는 설렁탕을 먹으며 더 생각해 보라고 한 뒤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간 엄마와의 대화와 나의 태도를 통해 이번 이혼사건이 스쳐가는 바람이 아니라는 것을 슬슬 눈치채고 계신 듯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점심, 아빠는 밥을 먹으며 반주를 하고 계셨고 엄마는 아빠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빠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아빠는 존경스러운 아빠와는 거리가 멀다. 그냥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너무 감사한 존재. 그래서 보답해야 하는 분. 딱 그 정도였다. 아빠의 영향으로 나는 담배 피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담배 피우는 남자는 도통 멋있지가 않아서 남자로 보이지도 않는달까?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아빠 때문에 엄마의 잔소리는 마를 날이 없다. 술 먹고 하는 자잘한 실수와 무심한 성격 때문에 늘 열을 올리는 건 엄마다. 평소엔 귀여운 잔소리로 끝나지만 가끔 엄마가 너무 속상해하면 진심이 담긴 지나가는 말로 "이혼해~ 요즘 황혼이혼 많이 하잖아."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아빠의 언성이 높아졌다. 남편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속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술 먹고 언성 높이는 거 진짜 싫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는 엄마아빠 싸움에 껴들었다. 엄마는 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빠가 술을 먹으면 평소에는 그냥 넘길 일에도 가끔 성질을 내곤 하는데, 그런 거였나 보다. TV 보는 아빠에게 엄마가 뭘 물어봤는데 대뜸 성질을 부렸다고. 엄마가 너무 속상해하시길래 아빠한테 뭐라고 했더니 "그만!"이라며 내 말을 막았다.


"뭐가 그만이야, 얘기를 해야 엄마 기분이 풀리지."

"그만하라고 했어?!"

"아니, 잘못했으면 미안하다고 하든가! 그만이라고 하면 다야?"


나는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낼 짜증을 아빠에게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잘못했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던 남편. 혼자 화를 풀고 삭혀야 했던 시간들에 대한 불만이 아빠의 모습을 보며 올라왔던 거다. 그렇게 몇 번의 말대답 후 결국 사건이 터졌다.


"그만하라고 했지!!"


아빠가 들고 있던 냄비를 바닥에 던졌다. 바닥이 움푹 파였다.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너 이놈 새끼 그런 식으로 하니까 이혼하지, 너 ㅇㅇ이한테도 이랬지?"



그때의 상처


나는 공포와 경멸이 섞인 눈빛으로 아빠를 쳐다봤다. 억울했다.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편이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내가 혼자 견뎌온 시간들이 어땠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하지만 묘하게 아빠 말이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던 거 같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는지도.


"아빠가 뭘 알아! 걔 화나면 맨날 욕하는 것도, 옆집이 신고해서 경찰 온 것도, 걔가 나 때린 적 있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잖아! 아빠도 걔랑 똑같아!"

"이놈이 끝까지 대들어?"


아빠는 나를 향해 손을 올렸고 엄마가 아빠를 말리며 그 손을 잡았다. 아빠는 놓으라며 엄마의 팔을 뿌리쳤는데 수술한 팔이 조금 꺾였는지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아파하셨다. 아빠는 그걸 보고 더 화가 나서 옆에 있던 경태의 양치 껌 박스까지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평화로운 오후는 순식간에 엄마의 곡소리와 나뒹구는 깨진 플라스틱 조각, 그리고 경태의 양치 껌들로 심란해졌다.


아빠는 한 번도 손찌검을 하신 적이 없었으니 아마 진짜 때리진 않으셨겠지만 나에게 손을 올린 것도, 그렇게 화내는 걸 본적도 처음이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겁이 나는 것도 있었고 실망스러운 모습에 대한 분노와 좌절도 있었을 거다.


엄마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나는 그대로 운동복 같은 잠옷 차림으로 경태만 데리고 집을 나왔다.

나름, 난생처음 해보는 가출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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