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원래 늦게 자는 편이긴 하지만, 평소 자던 시간이 지났는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딱히 분노가 치밀거나 격하게 슬프거나 그런 감정의 동요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놀랍도록 차분했다. 그냥 한바탕 싸우고 난 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새벽 같았다.
(전) 남편은 잠들고 나는 홀로 깨어 글을 쓰거나,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하나마나한 고민을 하던 그런 새벽 말이다.
정말 끝이다 생각하니 허무하면서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했다.
'나 정말 미련이 하나도 없나 보구나?'
이렇게 돼버린 상황에 대해 남편이 원망스럽지도 딱히 크게 실망스럽지도 않은 걸 보며 이미 남편에 대한 기대치와 신뢰가 바닥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서로가 서로를 못 믿는 이런 사이는 서로에게 독이 된다는 걸 알았지만 여느 부부처럼 단호하게 끊어내지 못했던 우리.
'차라리 잘 됐다.'
어차피 엄마 때문에 한 달간 서울에서 지내야 하니 자연스럽게 별거도 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정말 끝낼 수 있겠다. 마음 약해지지 않을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며 지금 상황이 오히려 좋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렇게 일기를 쓰고 책을 보다가 5시쯤에야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11시다. 평소처럼 물을 한 컵 먹고, 세수를 하고, 경태 산책을 나갔다 들어오니 아빠가 설렁탕을 사 왔으니 같이 먹자고 한다. 그렇게 엄마아빠와 같이 설렁탕을 먹으며 아빠한테 얘기를 꺼냈다.
"아빠,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 나 이혼할 거야."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밥만 먹었다. 엄마도 말이 없었다. 내가 산책을 하는 동안 아빠는 설렁탕 거의 다 먹었기 때문에 다행히 그 무거운 침묵은 길어지지 않았다. 아빠가 그릇을 비우고 일어서는 소리가 반갑게 느껴지는 찰나, 아빠는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더 생각해 봐."
엄마는 우리 사이가 심각한 상황까지 갔었고 부부상담을 받았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어제 많은 것을 얘기하기도 했고, 작년에 남편이 이혼할 거라고 전화하는 바람에 이혼을 결심하게 했던 주요 사건에 대해선 이미 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우리의 이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아빠는 아니었다. 아빠는 우리 사이에 있던 일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집에서 유일하게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남편이었기 때문에 아빠는 그가 집에 오는 걸 좋아했다. 어른에게 유독 깍듯했던 그여서 아빠 한 마디면 껌뻑 죽는시늉을 했다. 엄마, 언니, 나 기 센 여자 셋에게 주로 구박을 받는 역할인 아빠는 꽤나 외로웠을 건데, 그런 아빠의 유일한 지원군이 되어주던 살가운 사위였다.
자기도 자기 아빠는 용서 못했으면서 우리 집에서 머물고 가는 날이면 아빠한테 잘해드리라고 하던 남편. 그러니 아빠가 우리의 이혼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의 만행을 모르는 아빠니까 잠깐 싸우고 지나가는 고비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 아빠를 붙잡고 남편이 이랬고, 저랬고 남편욕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나쁜 적도 많았지만 좋은 적이 더 많았던 사람이라 마냥 그가 나쁜 놈이라서 헤어진다는 식의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도 많이 잘못했고 못나게 군것도 많아서 우리의 이혼 사유가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를 끝까지 감싸 안지 못하는 나의 인내심 부족 탓하게 될 때도 있다.
아빠의 한 마디에 그가 좋은 사위였던 순간들이 떠올랐고, 이 거실에서 함께 맛있는 걸 먹고, 오두방정을 떨고, 꼭 붙어 영화를 보던 그런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빠의 말 때문인지 어제는 멍했다면 오늘은 조금 우울한 기분이었다. 그나마 이 상황을 알 턱이 없는 경태가 재롱을 부리고 애교를 부리는 통에 한바탕 웃고 귀여워하니 기분이 한 결 나아졌다.
그러던 중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연락올 사람이 없는데, 순간 '남편인가?' 생각했다. 또 미안하다고 잘하겠다고 하는 거 아닌가, 이번엔 진짜 받아줄 생각이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봤더니 남편이 sk데이터를 보냈다. 나는 데이터를 많이 쓰는 편이 아니라 일반 요금제를 사용하고 남편은 무제한이라 월초에 이렇게 데이터를 보내준다.
남편의 사과는 보통 이런 식이었다.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닌 요리를 해서 먹으라고 하던가, 산책을 가준다던가, 눈썹을 깨문다던가 하는 미안하다고 하긴 싫지만 화해를 하기 위해 스리슬쩍 넘어가는 행동들. 자기는 화가 풀렸다고, 내가 사과하면 받아줄 의향이 있다는 의중을 이런 식으로 전했다.
어제 그렇게 경우 없는 행동을 하고 가버렸으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데이터를 보내는 그에게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분노의 카톡을 썼다. 공포의, 장문의 카톡을.
나도 참 피곤한 사람 같다. 카톡을 보낼 때는 몰랐으나 내가 이 카톡을 받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니 숨이 막힌다. 나도 남편과 지내며 답답한 순간이 많았지만 남편도 나랑 살면서 참 숨 막히고 갑갑했겠다. 사사건건 나의 행동은 다 맞고, 정당하고, 응당 그래야만 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듯한, 빈틈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저 카톡이 지금 보니 참 꼴 보기가 싫다. 애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악만 남았다. 남편한테 보내는 게 아닌 어디 철천지원수 대하듯 하는 저 태도. 남편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길어 전체 보기를 눌러야 봐지는 저 장문의 카톡 맨 끝에는 이렇게 썼다.
그동안 즐거웠고, 고생 많았고, 지긋지긋했다.
이젠 끝내자 너도 마음 잘 정리하고 있어.
"이젠 끝내자" 이때 뭔가 느낌이 왔다. 여태껏 수도 없는 이혼위기 속에서 "이혼하자, 그만하자"라는 말을 몇 번이고 했었지만, 이번엔 진짜구나 라는 느낌.
순간 애들 장난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이별도 카톡으로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만나서 하는데, 몇 년을 고민해 온 이 중대한 사항을 카톡으로 끝내버린다는 게 가볍다 못해 장난처럼 느껴진 거다. 하지만 뭐 별수 없었다. 지금은 그냥 내 삶에서 빨리 남편을 지우고 내 앞길과 내 살길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아주 짧게 카톡이 오가고 나는 어제 사 온 빵과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며 평온한 하루를 보냈다. 저녁 8시 무렵 팔이 불편한 엄마의 샤워를 돕고 나왔을 때쯤 또 카톡이 왔다. 남편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