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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원 Nov 04. 2021

너에게 여름을 보낸다

나를 찾아가는 여행에세이 10 - <너에게 여름을 보낸다>를 읽고


윤진서님의 감성이 좋아서 다섯 번이나 읽은 책이다. 여름의 끝자락에 서핑을 만나고 부푼 마음으로 다음 서핑 여행을 준비할 때,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인연처럼 서핑을 만나고 파도와 바닷가의 사람들, 자연의 아름다움, 원색의 생명력에 눈을 뜨게 되면서 그녀의 삶 자체도 내면에서 바랐던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런 과정을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녀만의 감성으로 써 내려간 글을 읽다 보면 나 자신의 이야기 같아서 마음이 두근거리고, 떨리고, 기다려지고, 쏟아내고 싶어지고, 그리고 또 무르익어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마지막 장을 덮고 눈을 감으면 그녀가 말했던 서프보드에 몸을 싣고 해변에서 멀리 떠밀려왔을 때, 바다에서 한없이 작아지며 뭔가 물컹한 것이 마음을 지나갔고 자연에 눈뜨게 되었다는 그 순간이 떠오른다.



두려워하면서도 거센 파도를 피해 멀리멀리 이곳까지 나왔다. 내가 얼마나 강하게 삶을 원하는지, 살아보려고 애썼는지를 대번에 느끼는 순간이어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주르륵 흐르는 물기의 따뜻함을 느끼며 아, 살아 있다는 것은 가끔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사람과 언덕에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해가 지고 있었고 나는 한없이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p.20)


어쩌면 비슷한 마음의 언저리에서 우리는 서핑과 만났다.



그리고 가끔 일을 하지 않을 땐, 여행을 다니며 이것저것 사소한 취미를 발견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괜찮다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대로 평생을 산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는 직업이 자유로워 좋았던 적도 있었지만 때때로 오로지 혼자라는 기분을 느껴야 할 때에는 그 사실이 더없이 무섭기도 했다.
'나는 정말 내 삶에 만족하는 걸까?'라는 문장이 섬광처럼 번쩍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도돌이표처럼 매일을 그 속에서 소비했다. 일도 여행도 무엇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했다. 무엇 하나 새로울 것 없이 이렇게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남은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즈음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치 인연처럼 서핑을 만난 것이다. (p.82-p.83)


12월에서 4월 사이의 서핑은 바다의 수온이 낮아서 매우 춥다. 수트 뿐만 아니라 후드 모자, 장갑, 부츠를 신어 방한에 대비해야 한다. 그녀는 겨울서핑을 견디고 나면 뭔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나도 같은 마음으로 두근거렸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더 이상 하얗고 멀건 얼굴과 마르고 가는 팔을 가진 도시 사람이 아니라 '환하게 웃는 타히티의 바다 여자 같은 얼굴과 거친 파도를 누르며 일어날 탄력 있는 허벅지'를 가진 사람이 되어도 기쁠 것 같았다.



사람들은 겨울의 거친 파도와 추위를 잘 견디고 나면 여름 서핑이 쉬워질 거라고 했다. 난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는 지칠 때마다 혹은 무서워 겁이 날 때마다 '강해질 거야'하고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  힘든 걸 견디고 나면 난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보고 싶은 것을 보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입고 싶은 것을 입는, 꾸밈없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 새로운 자신의 탄생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p.27-p.28)


누구나 인연처럼 만나게 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이전까지의 당신은 거품이 되어 죽음을 맞고 새로운 파도처럼 바다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흙냄새 묻고 소금에 절여진 나의 몸뚱이와 까맣게 타버려 예전과는 다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부모가 나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내가 원해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p.181)


서핑을 하게 되니 선스틱이 묻을 수 있는데다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몸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에 헐렁하고 편하고 뭐가 좀 묻어도 상관없는 옷만 늘 입게 되었다. 옷 한 벌이면 충분했다. 하루 종일 웻수트를 입고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며 환하게 웃다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온몸이 녹아드는 행복을 느끼고 손수 지은 밥을 먹고 노곤노곤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 관광도, 쇼핑도, 외식도, 멋진 카페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서핑을 하는 시간이 다른 무엇보다 소중해진 것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서핑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예전의 나와는 다른, 나의 자유로운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어느 날,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내가 되려고 했던 무수한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p.217)


우연처럼, 인연처럼 무엇을 만나든 그 무엇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느낄 수 있고 잊고 있었던 나와 하나되는 순간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되려고 하는 모든 모습을 놓아버릴 때, 자연스러운 나로 살아갈 수 있다. 아마 자유란 것은 그런 느낌이 아닐까. 무엇에서 벗어나거나 무엇을 성취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존재와 하나되는 느낌.



여름풀의 이파리


<시>


나 자신의 노래 1

 


나는 나 자신을 기리고 나 자신을 노래한다.

내 믿는 바를 그대 또한 믿게 되리라.

내게 속하는 모든 원자(原子)가 그대에게 속하기 때문

 

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한다.

나는 한가로이 기대이며 헤매며

여름 풀의 이파리를 바라본다.

 

나의 혀, 내 피의 원자가

이 토지, 이 공기로 빚어졌고

나를 이렇게 낳아 준 부모도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그 부모에게도

또 부모가 있다.

지금 빈틈없는 건강체인 서른일곱의 나는

숨지는 날까지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여기 첫걸음을 시작한다.

 

 

월트 휘트먼 Walt Whitman (1819-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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