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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Jul 21. 2023

서이초 교사 사건에 대한 짧은 단상

공교육이 무슨 힘이 있어요, 이빨 다 빠진 호랑이인데.

모두에게 다양한 생각이 들 것이다. 지금 상황을 돌이켜 볼 때.


아이를 키우면서 간혹 엄마와 교육철학이 부딪힐때면, 나는 격세유전을 떠올리고는 한다. 

격세유전, 생물학적 유전이라는 과학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세대를 넘어 유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봤을 때 이것은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바로 윗세대가 아니라, 조상들의 생활 양식이 생물학적으로 이어지는 것.

좀 더 철학적으로 논하자면 그 유명한 헤겔의 정-반-합의 논리가 있겠다. 논리적인 전개 방식의 흐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흐름으로 더 크게 보자면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거대한 담론들을 굳이 꺼내오는 이유는 뭐냐면, 우리 사회의 흐름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서다.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불이익과 부조리함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나도 이번 서이초등학교 사태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만큼 세상을 알게 된다. 남의 중병이 내 고뿔만큼 중요하지 않듯, 결국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다보니 자신의 경험이 중요하고, 자신의 자아가 중대하다. 



상처 하나 없는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배경만 보면 상처 하나 없이 살아와야 했던 사람도, 또 상처 투성이여야 하는 사람도 모두 상처투성이로 제 살을 핥아주기도 하고 남의 상처를 후 불어주기도 하면서 살아왔다. 그 상처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살아오면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성장배경이나 자아에 영향을 미칠만한 중대한 경험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은 자라면서 직접적으로 자신이 경험했고, 억울했고, 상처받았던 기억들이 자신의 자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과 억울함과 상처를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어른은 역시 부모님선생님이다. 



8090년대의 성인들은 나를 이렇게 만든 것. 나를 이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게 만든 것. 인생을 돌이켜 회고해 봤을 때, 부모님과 선생님의 그 한마디였다. 하는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별 것 아닌 그 한마디가 나를 주눅들게 하고, 냉소적으로 만들고,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아이를 상처받지 않게 하려고, 나처럼 되지 않게 하려고, 그래서 내가 커오지 않은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서 기른다.     



그러다보니, 이제 아이들은 8090년대의 성인이 자랐던 방식으로 자라지 않는다. 다른 방식으로 자란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완벽해졌는가? 아니다. 살면서 사람이 겪는 상처, 억울함, 경험들은 예측할 수가 없다. 누구 하나 일반적이고 평범한 비교대조군을 가질 수 없고 개체개체마다 다양한 특성이 있고 개성이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개별화된 경험에 대해 완벽함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어떻게든 인간은 자라면서 상처를 받을 것이다. 수치심을 느끼고 억울함을 느끼며 열등함에 치를 떨고 냉소적으로 우울해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음 세대들의 우울함과 냉소, 억울함과 열등감, 수치심, 상처 등에 대해 사과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엔 북받칠 것이다, 너무도 열심히 길렀기에. 최선을 다해서 길렀기에.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어, 하던 부모 세대와 똑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과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 부모와 다르기 때문에.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자식들은 단 하나의 상처 하나 없이 부모를 완벽하다고 존경할까? 


그렇다면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떨까. 우리는 체벌이 당연시되었던 시대의 학생부터, 학생인권조례 선포로 학생의 인권을 무려 교권과 다퉈야 하는 시대의 학부모까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학생인권이 문제가 아니다.다. 갑자기 소환되어 조리돌림당하고 있는 오은영 박사의 말대로 학생은, 아이는 죄가 없을 지도 모른다. 사실 이 서이초등학교 사건이 대두시킨 것은 학부모가 교사를 대하는 문제다. 너무 당연히 자신의 경험으로 선생님을 판단내리기 때문에 학부모인 지금도 억울했던 학생의 입장에서, 상처받은 학생의 입장에서 선생님을 대한다. 그러나 나의 아이는 그렇게 억울하지 않다. 그렇게 상처받지 않았다. 그렇게 기르지 않았잖는가.



(할 말이 길어져 다음 편에 계속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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