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을 변화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변해야 할 것이다.
*앞 글에 이어서 씁니다.
서이초 교사 사건에 대한 짧은 단상 (brunch.co.kr)
같은 학교의 동창을 만날 때도 각자 학교에 대한 회고점이 다르듯이, 모든 개개인은 각자의 회고점이 있다. 나는 나의 아이를 낳았지만, 때로는 내 아이가 낯설다. 마찬가지로 나의 엄마도 나를 최선을 다해 길렀겠지만, 때때로 그렇기에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개개인의 삶은 과거-현재-미래로 이루어져있는 하나의 작은 역사이므로 정반합의 논리에 빗대어 여겨보면 모든 기성세대들은 신세대가 불편할 것이고, 신세대는 기성세대를 이해할 수 없다. 정과 반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의 입장에서 아이를 길렀고, 이들은 정으로 자라나 우리 세대와는 또다른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그럼 또 어떻게 아이를 기르게 될까. 오히려 반의 세대에게 길러진 그들은 또 정의 방식으로 아이를 기르게 될 것이다. 왜냐면 어느 입장이나 완벽하거나 완전할 수는 없기에.
우리 아이 세대들은 다시 자신의 아이들을 미국식 육아가 아닌, 유럽식(전통적이고 강압적인, 이를테면 프랑스 육아)로 길러낼 수도 있다. 개개인의 마음을 존중받고, 문제점에 대해 개별적인 원인을 찾으며 접근했더니 이런 점이 좋지 않더라,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글 초반에 격세유전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엄마보다는 외할머니의 육아 방침과 더러 맞더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공교육은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조금씩 획일화된 전체 중심 교육과정에서 개별화 교육과정을 위해 변해왔다. 차근차근 변하고 있는 바에 비해, 학교 외 사회환경이 너무 빨리 변화했다. 그 학교 밖 사회환경에서 변하는 육아 및 교육 스타일이 너무도 빨리 유행을 타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공교육에서 발생하는 분란을 잠재워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교육을 놓을 수 없다. 학교에서밖에 배울 수 없는 게 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경험한 공교육에서 만난 이(선생이든 친구이든)의 행동이 과해서, 무기력해서,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경험의 결과가 결국 지금의 못마땅한 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공교육을 원망한다. 그 선생님만 없었어도, 그 친구만 안만났어도.
그 모든 부정적인 경험들이, 비록 내게 공교육이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이른바 ‘정전’이라고 하는 지식과, 사회화되는 과정을 습득하게 했어도 원망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세대갈등과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실제 부모나 선생에게 분노를 투영할 수는 없다. 그들은 어쨌건 그 시기를 살아냈기 때문에 이미 변했거나, 혹은 아예 만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치유받지 못한 분노는 현재의 공교육에게로 흐른다. 게다가 그 선생님이 학부모가 학생이었을 때처럼 권위가 가득하다 못해 넘쳐서 나를 때려도 될 정도의 권력도 없고,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어 보인다면...?
지금같이 공교육이 무기력해지는 상황에서는 아무도 승자일 수 없다. 이 교육 시스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도, 살아남지 못해 탈주하는 탈주자도, 흘려보내버린 방관자도 누구 하나 승리자랄 것 없이 아이들은 각자의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음습한 승리감을, 무기력과 열패감을, 기이한 모방학습과 열등감을 배우게 될 것이다.
기존의 교권은 너무도 강력했고, 그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커버렸다. 그렇지만, 강력한 교권에 대해 저항하는 시도는 그 사이에 지속적으로 있어왔고, 덕분에 ‘저렇게’ 바뀌어버렸다. ‘저렇게’ 바뀐 교권을 ‘이렇게’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도 지난한 일이다. 우리 세대의 의식이 점진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학교 교육과정이 어려워졌네, 쉬워졌네가 아니고, 교사들의 일이 얼마나 다면화되고 평가체계가 복잡해졌는지에 대한 이해도가 학부모에게 먼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개성이 얼마나 강조되고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한 불이익은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내 아이의 개성을 위해서 다른 아이의 양보를 부르는 것, 그리고 내 아이의 편의를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다른 아이의 불편을 감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했던 행위는 다시 나에게 그대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도 감수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행위들의 발로가 내 아이를 위해서인지,
기존의 상처받았던 아이인 나를 위한 것인지도 면밀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공교육은 이제 더 이상 갑이 아니다. 나는 이제 교사의 열정을 갈아 넣어 학생을 길러내는 공교육을 신뢰하지 않는다. 폭탄돌리기로 신규교사 하나 억지로 희생해가는 교육 체제는 변해야 한다.
교권신장이란 단순히 학부모가 교사에게 네네,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힘내세요, 하고 드리는 선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학부모가 이뤄낼 수 있는 교권신장이란,
1. 담임교사의 업무가 과중하여 학생들에 대한 케어가 미진할 수 있으니, 교사 및 행정보조의 추가채용으로 행정적인 업무를 줄여줄 수 있도록 하라든가
2. 학교폭력 관련해서 사안이 심각하니 그 관련 전문가를 추가 채용하여 교사에게 올 수 있는 스트레스를 줄여 학생케어가 가능하게 하자든가,
3. 아이의 교실 내 문제행동이 궁금하니 전교적 차원에서 학부모 참관수업을 실시하는 동안 교사의 교수법보다는 학생의 학습법에 집중할 수 있게 관련 체크리스트를 전달해달라든가 하는 것들이지 않을까.
물론 모르겠다, 이런 것들을 실제 학교 현장에서도 원할지.
그러나 어쨌건 학부모의 힘은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센데도 그것들을 엄한 곳에 발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커버린 성인이자 사회구성원들로서, 학부모가 제기할 수 있는 민원은 학교 내부 구성원들의 열정을 강압적으로 불사르는 것이 아닌, 외부 자본이 결합 되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내 세금 받고 뭐하는 짓이야~? 하고 개개인의 교사에게 따지지 말고, 내 세금으로 이렇게 하면 어떤가 하는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문제 해결법을 제시해볼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선생님을 잃은 이번 서이초 사건은 너무 마음이 아프다. 사실 그 선생님의 마지막 장소가 학교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3년 죽어라 공부해도 가기 힘든 교육대학교를 졸업해서, 난다긴다 하는 동기들 사이에서 4년간 열심히 공부해 학점이수 및 수업을 받은 후, 그 해 수험생 사이에서 합격하기 위해 초등 임용고시를 위해 달려야 한다. 7년 넘게 모든 바늘구멍들을 통과해서 겨우 자신의 꿈을 이룬 교사가 그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지독히도 서로 불통하며 외면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다면, 이제는 정말로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