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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Jan 12. 2024

나도 엄마가 있어(편지_김남조)

부치지 못할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은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 <편지>




엄마가 병원 진료를 위해 올라오신 지 3일 차,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느라 분주하던 엄마는 아침에 라디오를 틀고, 식사를 준비하며 엄마의 자식과 손자를 흥겹게 깨운다. 늦잠꾸러기 딸은 일어나지 못하고, 손자는 할머니의 소리에 벌떡 일어난다.


할머니, 어디 있어요? 오늘은 언제 올 거예요?      

할머니가 오면 매일같이 일찍 하원한다는 걸 아는 손자는 아주 기특하게도 간드러진다. 애교를 부리고, 할머니 옆에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는다. 부치는 체력에 못 이겨 금세 짜증을 내는 엄마와 다르게, 할머니는 여유 있고, 같이 춤도 춰주고, 아침에 종이접기도 해 준다.


세상에, 나는 아이의 옷을 꺼내와 바닥에 내려놓는 게 다인데.



아침에 웃음을 주고받는 조손을 보자니,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져 온다. 그리고 편안함도. 만약에 내가 늦는다면 대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가.  



“우리 손자는 뭘 줄까?”

매번 나를 깨우며 엄마는 묻는다.      

아 뭘 줘, 그냥 아무거나 줘. 하려다가 엄마한테 친절해야지.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에게 친절할 거야. 하는 3일째 다짐을 내세우며 일어난다. 엄마는 매번 아침에 따뜻한 반찬을 하고, 국을 데워놓고는 묻는다.


00 이는 뭘 줘야 하니?     



새로운 형태의 답정너다. 이미 준비는 다 해놓고, 손자에게 그중에 뭘 줄까 고민하는 건가. 엄마를 찬찬히 바라보고, 반찬을 한 번 본다. 왜 매번 물어볼까. 항상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은데. 심지어 늦잠 자면 아침도 주지 않을 때가 많은데 왜 굳이 이걸 물어볼까. 약간 짜증도 치민다. 왜? 왜 자꾸 물어보는 거야? 이 중에 고르라는 건가? 아니면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물어보는 거야?          


아침에 부치기도 힘든 애호박전이라니...

식탁을 내려다본다. 어쩐지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했다. 아침부터 고소한 냄새가 난다.

내가 좋아하는 애호박 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미역줄기볶음.

이거 너 좋아하잖아. 근데 00 이는 뭘 줄까?          



그제야 나는 깨닫는다. 엄마의 자식이 나인 것을.

엄마의 사랑스러운 손주도 귀엽지만, 엄마의 가장 첫 번째는 나라는 것을.

너무 일찍 나가느라 챙겨주지도 못하는 사위는 차치하고,

남은 꾸러기들 중에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해야 되는 것은 바로 엄마의 딸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아이와 함께 외출하거나, 우리끼리 밥을 먹을 때는 아이는 뭘 줘야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이가 좋아하는 위주로 이미 다 결정되어 있었고, 나조차도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니까. 부모 위주보다는 아이 위주의 식단이 좀 더 편하니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주로 애호박 전, 미역줄기볶음, 시금치, 콩나물 같은 사사로운 밑반찬들이라 굳이 얘기하지 않았었는데, 엄마는 그걸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엄마 먹고 싶은 거 먹자.

하면서 자리에 앉으면 나는 그동안 너무 오래 아이의 엄마로만 살았다는 것을 생각한다. 엄마는 뭘 좋아하고, 엄마는 뭘 먹어야 하며, 엄마는 뭘 먹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게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히 엄마가 아프게 되면서 당신이 자주 봤던 유튜브나 블로그의 정보글이라도 줬을 텐데. 그게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가 먹으면 안 됐던 것. 지금은 먹을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은 너무도 뇌리에 박혀있어서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옳다구나 하고 대답할 수 있는데.     


엄마는 뭐든 잘 먹지. 해놓고 맛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입꼬리가 내려가는 엄마는,

아직까지도 나의 엄마로 사는 게 너무 익숙하다. 장성한 아들, 딸을 결혼시키고 완전히 독립시키고도 아직도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은 잘 고르지 못한다.

엄마는 못 먹는 거 없어. 해놓고도 낙지 먹을까? 하면 낙지는 엄마가 예전에 체한 적이 있어서. 하는 엄마는,

이제는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을 해놓고 우리 손녀는 뭘 좋아하누? 하는 외할머니의 딸로는 살 수가 없다.

엄마도 엄마가 있었지만, 이제는 없다.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을 말하지 않아도 해놓을 사람은 이제 누가 있을까.     




오랜만에 엄마는 엄마의 오빠를 만나러 간다. 오랫동안 전화로만 안부를 주고받았고, 격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하는 외삼촌 부부는 엄마의 마지막 남은 친정이다. 배낭을 메고 가볍게 할머니는 오빠를 만나러 간다고 손자에게 편지를 쓰고 집을 나서는 엄마는 봐온 중 가장 소녀 같다.      

냉장고에 쪽지 붙였을 때랑 사뭇 글씨체가 다르군 엄마... 손주한테 쓰는 편지는 글씨가 넘 예쁘다


여기로 가면, 외숙모가 나와있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 이런 거 잘 찾아가.     


하는 엄마가 버스 탈 때까지, 멀어질 때까지 보고 있다.

버스 안에서 누군가 크게 손을 흔들었는데, 엄마였을 것 같다.      

누군가 자기한테 그러면 창피해할 거면서, 엄마는 그런 걸 잘도 나한테 한다.




나도 알지. 엄마.

엄마는 항상 잘 찾아가.


엄마, 그래서 나는 내가 걱정하는 게 길을 잃어서 나를 못 찾아올까 싶은 엄마인지,

엄마를 못 만나면 어쩌나, 싶은 나인지 모르겠어.     


체구도 작으면서 최신문물도 잘 모르면서 어찌나 길은 잘 찾고 걸음은 빠른지.

매번 보이지도 않게 성큼성큼 척척 걸어가 버리는 엄마의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어.


엄마가 나를 제일 사랑하지 않는다고 원망한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어.

지금도 제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엄마의 사랑이로 더 오래 있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엄마가 내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제 일어나야제. 하는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오래오래 손주 재롱도 보고, 손주 사춘기도 보고, 손주 결혼도 보면서

니도 이제 내 마음 알것지야? 가시내, 하면서 날 놀렸으면 좋겠어.


이런 편지는 부치지 않을 거야. 엄마. 엄마. 엄마,

부디 오래 있어.

오래 살아.

건강해.

아프지 마.

부디.



나는 엄마의 딸로 오래오래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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