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작가 Jan 26. 2024

반차쓰고 당장 오라고 했습니다. (사평역에서_곽재구)

요즘 식으로 제목을 써봤습니다만...?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아유, 아까워서 어떡해.”     

남편의 반차를 쓰게 한 후 소환된 긴급 외부 회의가 간단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나서 내가 남긴 말이다.     

아까워서 어떡해.

남편 반차를 쓰게 했는데.

생각하고 돌이켜보니 내 일주일이 고되다.

나는 벌써 5일째 돌봄 휴가 중인걸? 

왜 나는 남편의 휴가는 아까워하고, 나의 갈아 만든 배같은 휴가는 아까워하지 않을까. 그 전에 나는 남편과 같은 회사원인데, 아이가 아플 때 가장 전면에 내세워지며 제일 먼저 내 휴가부터 소진하려 들까.




남편은 정성이라면 정성스럽고 유난이라면 유난스러운 아빠라, 경기도 아빠하이에서 상을 거머쥐고 말았다. 아빠가 아이와 놀아준 방대한 사진자료는 남편을 입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때때로 만들어진 영상 자료들도 그렇다. 아빠하이에 올라온 다른 사진들이나 영상들을 봐도 그렇다. 아빠와 아이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 당연하다, 엄마들은 그동안 아이들을 통해 본인의 사진실력을 한껏 키워왔다. 

아빠육아는 아직도 뚫리지 않은 블루오션이다. 아빠들을 내세운 육아는 어딜 가나 대단하다고, 기특하다고 칭찬받는다. 그렇지만 아빠가 상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엄마의 노력이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소용없다는 걸 안다. 때때로 나는 남편에 대해 칭찬하면서도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상장을 벽에 걸면서 

근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하지 않냐. 아무리 그래도 내가 70을 하고 오빠는 사실 30을 하는데.

하고 불퉁하게 내뱉으니, 남편은 끄덕한다. 내가 주양육자라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조차도 안하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그렇지. 5만 하는 남자도 있을걸.          


입이 댓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 남편도 알고 있구나. 매번 생색만 내서 모르는 줄 알았다. 그래, 사실 나도 안다. 네가 많이 하네 내가 많이 하네의 다툼은 이제 더이상 의미가 없다. 우리의 다툼은 조별과제 결과로 F를 유발할 뿐이다. 그런데, 육아는 재수강조차 안된다. 


참으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팀플이 아닐 수가 없다. 막상 서로의 합을 100%라고 가정해서 그렇지 사실 남편과 나는 개인의 체력을 재료 삼아 150%, 200%를 갈아넣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발표자 한 명이 30%, 50%만 갈려도, 어이구 잘 갈리네, 어이구 이 집은 참  잘 드는 믹서기네, 휴롬 한 번 해볼까 하고 칭찬받는 팀플이라니.          



나는 아이를 케어하면서, 적당한 정도의 일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런 덕분에 워라밸에 큰 문제를 겪고 있지는 않다. 당연히 월급은 다다익선이고 직급은 고고익선인 시대에서 저임금 저직급의 삶을 살아야 하긴 하지만, 살라고 하면 이대로 살아질 수는 있겠다. 싶다. 다만 가끔씩은 허할 수밖에 없다. 인정 받지 못하고, 때로는 인정받는다고 해도 원하지 않는 인정을 누리는 직장. 그것을 선택한 결과, 나날이 통장에 꽂히는 월급을 빠르게 이체하며, 겨우 한 숨을 내쉰다. 



그래도 육아보다 일이 쉬운 것은 애 볼래 밭 맬래 시절부터 내려온 육아계의 정설이므로, 상대적으로 쉬운 일을 뛰고 나서 자존감을 채우는 게 좋다. 주말엔 더 어려운 육아에 투자할 수 있는 정신도 체력도 적당히 안배된 30대의 엄마로서 가끔은 숨돌릴 틈도 있고, 때로는 자유부인(아이와 남편을 떼어놓고 즐기는 개인 시간을 말한다)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위해선 남편이 170%로 가동되어야 한다. 체력이 고갈된 남편은 내게 친절한 말투도, 상냥한 태도도 아니다. 아이와 즐거움으로 끝장나는 하루를 보냈다는 자신감 반과 근데 너는 뭐했냐는 힐난 반의 태도로 나를 반갑게 맞이하지도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한다. 

사진전에서 입상한 아빠 육아 사진

나는 남편이 퇴근하고 오면 해줄 집안일을 남기고 한다. 하지만 그는 회사에서 돌아와서 신발을 벗지도 않고 아이와 얘기하고 샤워하기도 전에 아이를 만지고 싶어 한다. 집에 오자마자 아이구, 내가 아이랑 놀게! 하는 남편을 보고 있다가 종종 일갈하고는 한다.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 옆에 왜 얼쩡거리느냐고. 


나를 도와! 나를 도우라고.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나를.


하루 24시간 중에 아이를 2시간도 못볼 때도 많은 프로야근러에게 잔혹하게도 나는 아이 발도 만지지 못하게 한다.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과 다르게, 내가 가장 비정하게 대하는 사람은 사실 남편이다. 물론 이 역도 성립한다. 내게 가장 잔혹한 사람도 남편이기에 서로서로 하루를 견딘다.



그는 이 시대의 아버지 중에 경기도 뭔 재단의 대표이사상을 받을 정도로 칭찬받을만 하나,

비극적이게도 이시대는 우리의 모성애와 부성애를 100% 발휘하게끔 하지는 못한다.


출산율이 자꾸 저하하는 글러먹은 시대고,

가임기 여성과 남성(?)들이 커리어 때문에 둘째, 혹은 아이를 포기하는 시대이므로.     


그런 바로, 나는 종종 생각한다. 고로 슬픔에 젖는다.


현 사회에서 30의 육아를 하는 아빠는 개인적으로 칭송하고 대단하다고 칭찬해줄 수 있다. 지금 충분히 갈리고 있는 아버지들을 위한 찬사가 될 것이다. 잘 갈리고 계시네요. 멋진 아빠십니다. 아빠들에게 상장도 줄 만큼.

그러나 이제는 사회적으로 적확히 50의 육아를 하는 아빠들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해야한다. 전업주부가 선택의 시기가 되어 버린 현대인에게는 또다른 대안이 나오지 않는 한 미래란 없기 때문이다. 

 



간혹 나도 갑자기 잡혀버리는 급회식에 기꺼이 참여해 업무스트레스 및 상사스트레스를 토로하고 싶지만 아이의 하원 때문에 모든 것을 접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남편과 함께 쓰는 스케쥴러에 다음주 회식 스케쥴이 등록될 때면 부아가 치민다. 나는? 나는 일 안하나?


아이가 아파서 줄곧 돌봄휴가로 아이와 함께 있다, 남편이 퇴근하고 오자 좀 쉴까 하고 누운 침대에 남편의 원망서린 눈초리가 세 번 이상 닿으면서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벌떡 일어난다. 이거 좀 같이 개자, 이것 좀 같이 하자 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적수가 따로 없다.



나는 출산율을 높이는 방법을 알고 있다.

모두가 알고 있다. 다만 시행하지 않을 뿐.     


당장 만 5세 미만의 아동을 둔 부모들은 육아기 단축근무로 4~5시 강제퇴근하게 해야 한다.

부모들에게는 no야근 no회식 no번개 3no슬로건을 내걸고 실제로 강요하지 않는다

정시 퇴근에 누구도 눈치 주지 않는 사회풍토가 법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돌봄 휴가는 부/모 각자에게 자녀 한 명당 15일을 주고, 

아이가 아플 때는 어떤 조건에서든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애는 너 혼자 키우냐? 애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등의 발언은 직장내 괴롭힘으로 선언되어야 하며

혹여나 그럼에도 부모의 일 때문에 아이의 돌봄이 여의치 않을 경우 운영되는 야간돌봄센터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센터는 동(행정구역 최소화!)마다 지정되어 운영되고 있어야 하고, 

당일 예약 같은 긴급 이용은 한달에 3번은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내 아이는 우리가 좋아 낳았고, 우리가 좋아 기르고 있다. 때로는 업무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만, 무한한 사랑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말도 안되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는 정말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실은 아이 때문만이 아니다. 

불투명한 경제사정 때문에, 미래에도, 현재에도 버거운 회사일 때문에. 하지 못한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에. 자꾸만 낡아가는 몸뚱이 때문에. 사랑으로도 버거운 현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부부는 훌륭한 팀플레이 모둠장과 모둠원의 관계이지만, 때로는 서로가 무임승차를 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감시원의 관계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간혹 있다. 아니란 걸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불쌍하고, 안쓰럽고, 안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밖으로 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힘들지, 쉬어."라는 말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때까지 함께 있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묶인 우리들은 점점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아이를 재운 우리는 서로 한숨을 쉬며, 한 줌의 눈물을 스마트폰 불빛에 던져넣는다. 그 조그만 도파민이라도 필요할 만큼 지친 서로에게 위안이 되지 못하고, 다들 나 같이 사는 거지? 다들 나처럼 버티는 거지? 하는 위안을 얻기 위해 오늘도 블라인드를 헤매고, 카페글을 헤맬 것이다. 


결국 너무 지쳐버린 우리 중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반차를 아까워하며. 

그러면서 누구보다 혹독하고 잔인하게 서로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채찍질하며. 

언젠가 오고야 말 막차를 기다리며.

그것이 첫차인지 막차인지 알 수조차 없는 채로.

서로에게 침묵하며.

서로에게 남은 톱밥이 어느정도인지 가늠하며

계속, 계속해서.

이전 08화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서른, 잔치는 끝났다_최영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