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 흔들려도 마주잡은 손만 있다면야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남편에게 내 뒤웅박에 타라고 멋지게 말한 것도 1년.
어느새 우리는 또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매해매해 이사를 가는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여달라고 말한 게 무색하게,
막상 다가오는 아이의 학령기를 얘기하며 내가 먼저 떠나자고 말했다.
사실 내게 있어 직주근접은 너무 좋았다. 그를 넘어선 직주동일은 너무 편했다.
다만, 편하다못해 너무 퍼졌다. 직장을 다니면서 사람이 지켜야 할 OOTD 라는 게 있는 법인데 그조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근처에 쉬고 올 휴게실 아닌 휴게실이 있다보니 잠 못드는 밤도 두렵지 않았고, 잠들지 않는 밤도 겁나지 않았다.
게다가 직장과 주거지를 동일하게 놓으니 나는 좀 더 아이와 함께 붙어있고, 즐겁게 살 줄 알았건만 오히려 잔소리가 늘었다. 좁아진 집에 맞추어 짐이 줄었어야 하는데, 그를 줄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과 주거를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 특히나 내게 일신상의 문제가 생겨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면, 바로 퇴거를 해야 하는 조건이라는 게 살다 보니 오히려 이상한 불안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퇴사는 먼 일인 나에게는 단지 그 정도의 문제였다.
사실 사택의 가장 큰 문제는 노후화와 안전이었다.
맨 처음 이사 오고 나서 사택은 이곳저곳 교체할 게 많았다. 금간 전등을 아예 갈아주면서 관리인 분이 얘기했다.
여기 천장은 석면이니까 이 가루 조심하세요.
석면, 석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검색해보자 덜컥 겁이 났다.
1급 발암물질로 지원금을 받으면서 다 철거하고 있는 상황에, 여기 천장이 그렇게 되어있구나. 하는 것도 잠시. 이미 결정했고 이사했으니 됐다. 눈 감고 살아보자, 했다.
몇 번의 집 수리를 더 받았고, 오래된 보일러도 교체했고, 에어컨도 수리했고, 전등도 갈았다. 기어이 안 들어오는 부엌 전등은 그냥 눈을 감았다. 사실 집 외벽 빼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리를 다 한 거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회사 건물이므로 이 모든 게 공짜였다.
그러다 엄마가 편찮으시므로, 우리 집에 올라와서 지낼 일이 종종 생기게 됐는데, 그때마다 남편이 밖으로 나와 자야하는 것도 엄마와 남편에게는 고역이었다. 정확히는 남편에게 고역이었을 거다. 한 두번이야 거실에서 자기도 한다지만, 아침에 어떻게 출근하는지 얼굴도 못보는 남편의 하루의 시작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미안하기만 했다.
그 외에도 사실 많았다. 무더운 여름에는 거실 에어컨 하나로만 나야 해서 땀에 젖은 채로 일어나기도 일쑤였고, 봄, 가을에는 너무너무 싫어하는 비둘기가 항상 창문에 와서 구구구거려 그쪽 창은 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사실 견디라면 견딜 수 있었다. 나는 괜찮았다. 아이와 나의 등하원 및 출근의 편리성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괜찮았고, 편했다.
내가 공짜에도 불구하고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게 있었는데, 바로 곰팡이였다.
사택에 거주하면서 우리는 몇 개의 불편함을 감수한 게 있었다.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지상주차였다. 일단 이사오면서 두 대나 차를 끌 일이 없어져서 한 대는 팔고, 한 대는 지상에 주차해놨었다. 그런데 세상에, 여름 장마철에 차에 누수가 발생해 트렁크며 뭐며 전부 물이 샌 것이다.
차에 곰팡이가 핀 광경을 처음 본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에는 창문을 열어놔서 그렇니 니 탓이니 내 탓이니 했다. 둘 다 아니었다. 소유한 차종에서 종종 발생하는 하자였고, 하자 처리를 하기엔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이 문제였다. 눈물을 머금고 거액을 주며 실내 세차도 하고, 수리도 했다.
그리고 나서 점점 쪼그라드는 내 뒤웅박을 보니 타라고 자신있게 말할, 기운이 없어졌다.
그러다 올 겨울
천장에 올라오는 점점이를 보면서 설마설마 했다.
책장 뒤를 살포시 밀어보니,
어마어마하게 벽을 차지하고 있는 시푸르댕댕한 청록색 곰팡이를 발견해버렸다. 책장을 들어내고, 곰팡이 제거제를 뿌리고, 급하게 예정되어 있던 여행을 떠났다. 2박 3일 제발 말라달라고 여행 일정 내내 창문도 열어두고 갔다. 빠지지 않는 락스 냄새를 겨우겨우 무시하려고 해도 아이가 갑자기 큼큼거리며 기침을 하게 되면 곰팡이 때문인가. 했다. 감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내 탓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남편이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건 뭐였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아마 아이의 몇 번 나온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엄마, 나도 친구들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
아이에게 좁은 집으로 이사갈거니, 이해해달라고 하면서 장점으로 엄마랑 더 많이 껴안을 수도 있고 사랑한다고 더 많이 얘기할 수도 있다고 했다. 실상은 그랬을까? 어째 일에 치여 더 많이 화내고,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것도 진심을 담아서는 하지 못했다는 게 내 뼈저린 후회다.
삶을 생각한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는 후회가 쓰디썼다. 나 혼자 편했던 걸까.
오늘은 오랜만에 아이를 등원시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얼마 남지 않은 아침 나날들을 손꼽아 보니, 이 편한 등원길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싱긋 웃으며 등원한 아침 나날들이 몇 번이나 될까. 마주잡은 손에 힘을 꽉 주자 아이가 왜? 하더니
알겠다는 듯이
엄마! 나도!
하고는 힘을 확 준다.
그래, 우리도 언젠간 사랑으로 가득한 뿌리 깊은 벌판에 설 수 있을 거다. 지금은 갈대처럼, 부평초처럼 살아야한다고 해도 사실 우리의 사랑으로 가득한 곳이 바로 벌판이겠지.
그래,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다 괜찮다고 해 준 남편과 아이가 있기에
나는 낡고 상한 몸으로라도 다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마주 잡은 손을 매만지며 하염없이 하염없이 오늘도 사랑을 빌어보았다.
우리의 한 해는 12월 31일로 끝나지 않는다. 늘 아이의 존재가 가장 큰 우리 집에서는 한 해의 시작은 아이의 생일 기점이다. 2월 말로 시작하는 우리만의 기원 후 한 해 한 해를 되새겨본다. 충분하고도 넉넉히 흔들려본다. 아이와 나와 남편의 한 해가 올해도 이렇게 갈 것이다.
엄마와 아내로서 충분히 희생하고 산다고 생각했건만 또 나를 엄마와 아내로 둔 사람들이 겪어야 할 희생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내가 감내하고 버텨내야 할 일도, 나를 감내하고 버텨내야 할 일들도 많다.
그렇지만 영원한 슬픔도, 비탄도 없다는 고정희의 시 구절답게 다시 마음을 다독여본다.
천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했던가.
그러나 흔들려도 놓지 않는 마주잡은 손만 있다면 나는 어른이 되지 않아도 좋다고,
오늘도 상한 갈대 같은 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