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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May 18. 2023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다소 정치적인 이야기


노량진에서 시험 준비를 할 때, 강원도에서 온 친구가 어떤 지역을 접수할 거냐고 묻기에 "글쎄, 서울이지 않을까?" 했다. 친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너희 지역은 안쓰고?" 라고 했을 때 답했다. 


"우리 지역은 국가유공자들이 많아서 자신이 없어." 


물론 적응할 대로 적응한 서울의 독립적인 삶을 버리고 본가에서 엄마아빠와 다시 살 붙여 살 자신이 없다는 불효의 마음도 어지간했지만, 실제로 고려할만한 사항이긴 했다.          



내가 살았던 도시는 5월 18일이 되면 학교에서 항상 묵념의 시간을 가지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 그리고 현 시대를 살아갈 수 있게 한 시민영웅들에 대해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지역방송의 아침 시간에는 관련 영상을 보기도 하고, 시청에서 주관하는 백일장이나 문화제를 열기도 했다. 별다른 애향심이랄 건 없고 오히려 떠나고 싶어 안달이었던 도시였지만 그 날만큼은 나 역시 도시의 일원이고싶어 안달이 났었다.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아니어도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자식이나 조카뻘쯤 됐다. 그러니 우리들 중 누군가는 가족을 상실했고, 그 결핍으로 인해 혜택을 봤다. 그러나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아도, 혜택받지 않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결핍이 점수로 치환되서 좋겠다는 얘기는 생각만으로도 죄스러워서 아무도 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단지 그 시대를 비극으로만 기억했던 것은 그 사건의 가해자가 멀쩡히 살아 그것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 곳 없는 분노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지 알았던 듯,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영상매체에서는 그 시대의 피해자들에 대한 조망만 했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나, 그 때 금남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최대한 당시에 초점을 맞춰 해결되지 못한 문제와 그를 해결하기 위해 증명해야 하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는 것만 이야기했다. 왜 증명을 해야 하지, 너무도 명확하지 않나 의아하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연희동에 살던 대학 동기에게 "야, 얘 동네에 전두환 살아. 얘 부자야~" 하며 농담을 하던 선배의 말에서야 아직도 부자로 건강히 살고 있는 그의 소식을 들었다. 징그럽게도 오래 산다며 때로는 비아냥거리고 때로는 욕을 퍼부으며 그의 말년이 조금 더 불행하고 불편하길 빌었다.           

2년전 그가 떠났을 때도, 남겨진 부인 이순자 씨는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빈소로 갔다고 한다. 저 사람도 떵떵거리며 남은 돈 다 쓰고 남은 생 보내고 살겠구나. 미움이 앞섰다. 

누군가는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끝까지 누리고 가면서 기어이 사과 한번이 없구나. 


당혹스럽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더더욱 갈 곳이 없어진 분노는 그저 삭여내야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 농담처럼 등장하는 그의 이름, 특히나 재산에 대해서 '그렇다더라~'하는 풍문들이 사회적으로 암암리에 등장할때면, 굉장한 무기력감이 들고는 했다.



그러다 최근에 전우원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그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그의 생애를 부정하는 그는 5.18학살자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부정했다. 그리고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무릎 꿇고 사죄하며, 자신의 코트로 비석을 닦았다. 진심일까. 모르겠다. 

연합뉴스의 이미지를 차용해본다. 

물론 누가 기다려왔던 걸 알기라도 하는 듯한 거침없는 행보에 대해 염려도 많고, 아직까지는 너무도 극적인 등장에 판단할 수조차 없다. 몇번이고 정치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용당하다가 그러다 또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실제 본인의 진심은 어디까지인지,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물속은 모른다는 옛 속담 그대로이다. 게다가 마약 투약의 이슈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다.  

출처 : 연합뉴스

그러나 그들을 보면서 먼 발치의 나는 또 내 주변의 소소하고 소박하게 숨죽이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도, 진심도 침묵 속에 숨겨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좀 더 평안하게 살 수 있었을까. 까짓 가산점 따위에 만족하지 않고, 좀 더 당당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었을까. 사람의 부재를 수치화시키는 사회 속에서, 그리고 그 정도면 되지 않냐고 얘기하는 타인의 무심함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아왔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무기력감과 얼마나 많은 불신감을 가지고 살아왔을지에 대해서도 한번 더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하는 술자리 농담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익명글들은 또 얼마나 많은 아픔이 될런지.


  



누군가의 인생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살아왔던 궤적을 거짓으로 똘똘 감아 반성 하나 없이 지켜나가는 인생과 삶을 치장하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켜내 가는 인생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것인지 오늘 같은 날은 항상 고민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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