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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니기리상 Aug 26. 2021

저녁 아홉 시의 흔적들

2021년 8월의 기록 - 그저 써보는 행위에 대한 예찬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이미지출처 : Youtube)


장기하와 얼굴들 - 별일 없이 산다​​



매일 저녁 아홉 시의 한비는 식탁에 앉아 그림일기를 쓴다. 나도 그런 한비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의 일을 요약하기보다는 그저 그날의 생각, 정확히는 그날 저녁 아홉 시의 순간에 드는 생각을 짧은 글로 남기고 있다.


단순히 일기를 쓰는 행위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저 작은 우주먼지일 뿐인 나를 골똘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선 예쁘거나 예쁘지 않은 더 작은 마음들이 끊임없이 고개를 내밀다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 들고 나는 마음들을 마주하는 일은, 마치 작은 아기 한비의 몸에서 눈썹이 가닥가닥 자라고, 귀여운 치아가 나고, 손톱 발톱이 자라남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러한 경험들을 그저 글로 옮기는 행위만으로 다시 조금씩 새롭고 건강한 마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씨앗 뿌리기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발견하고, 꺼내고, 종이 위에 펼치고, 글을 지어보고, 그로부터 성찰한 마음을 다시 거둔다.




2021.8.6.

얼마 전 복태와 한군 공연에서 복태 님이 하신 말씀이 뭘 해도 새어나가던 나를 끌어다 앉혀놓는다.

잘하는 사람은 많은데. 나 정도는 안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도 생각했다. 모두가 수려하고 유려한 글을 쓰는 공간이지만, 나 정도는 안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저 잔잔하게 나 자신을 위로하는 글을 쓰고, 그것이 다른 이에게도 위로가 된다면 그냥 그것이 나에게 또 다른 위안이 되지 않을까.


그냥 그런 마음으로 글을 짓겠다.


몇 년 전, 간간히 메일을 주고받던 지인으로부터 브런치라는 공간을 추천받았다.

꾸준히 글을 써보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격려와 함께.

검색해보니 브런치 작가 되기, 라는 타이틀로 회비를 걷어 운영되는 소모임이나 온라인 강의들이 쏟아져 나왔다. 더욱 자신이 없어진 나는 그저 열심히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어떤 바람이 불어 새벽에 벌떡 일어났고, 서랍 속 글들을 토대로 불현듯 작가 신청서를 써 보냈다.

3일이 지난 오늘 합격 소식이 메일로 날아왔다. 전업주부에, 일기 형식의 에세이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어느 합격 수기를 보고는 애초에 기대를 저버렸었는데…

그저 놀랍고 감사했다. 그리고 그렇게 얼레벌레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우선은 착한 마음을 먹고, 열심히 글을 짓겠다.







2021.8.10.

브런치에서 작가가 된 후 첫 글을 발행했다.

작가의 서랍에 저장해둔 글들은 거침없이 써 내려갔는데도, 막상 발행하려니 긴장이 되어 차일피일 미룬 결과가 오늘이다.

처음이라 그런지 몇 번이고 기웃거리게 된다. 이 설렘 또한 지나가겠지, 하다가 문득 두려움이 밀려온다.

음악도, 그림도, 바느질도 혼자서 심하게 정을 주었다가 스스로의 실력에 실망하고 고꾸라져 버렸다.

글쓰기도 그렇게 될까 봐 걱정이지만 그래도 우선은 가보련다. 그저 쓰고 쓰고 또 쓰기만을 반복해보련다.




2021.8.12.

남편과 막걸리를 마시다가 이야기했다.

“여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땐 열등감이나 초조함이 들지 않아서 드디어 스스로 치유되고 있다고 생각했어.
근데 멈추고 다른 걸 하게 되는 순간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들이 밀린 숙제들처럼 나를 덮쳐와.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하지?”

남편이 말했다.

“나도 몰라. 그런데 남들은 그런 거 잘 몰라. 근데 그냥 너를 부러워할 수도 있어.”

이게 무슨 동문서답이야. 맞다. 남편은 ESTJ. 나는 INFP. 아, 맞다 그랬지. 하나도 겹치지 않지.

그렇게 끊임없이 내 마음에 충족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냥 어느 무엇도 내 기준에는 완벽하지 않은 것이 속상하다.

분명 일주일 전엔 나 하나 정도는 완벽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완벽하지 않은 것이 속상하다. 아, 갈대.




2021.8.14.

내일이 엄마 생신이라 엄마, 남편, 한비와 넷이 외식을 했다.

집에 돌아와 남편은 이발을 하러 다녀왔는데, 요새 다이어트도 하고 머리도 깔끔해지니 참 예쁘네 하고 오랜만에 생각했다.

가끔 무뚝뚝해진 남편을 바라보며 세월이 야속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나 남편 좀 사랑하네.


그림은 여전히 마음에 들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도, 시간이 걸려도 언젠가는 완성하겠거니 하는 마음에 조바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진 건지 그림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지 잘 모르겠다.

애정이 식었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만약 그렇다면 왠지 오랜 연인을 배신하는 기분이라 슬프고 유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그림은 늘 잘 그리고 싶다.



그림을 그립니다. (Instagram : @innnerpeace_)








2021.8.23.

글을 계속 쓴다. 스스로도 부끄럽게 여기던 마음을 계속 마주하고 드러낸다. 그랬더니 질투가 조금 가라앉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다른 이의 삶에 나를 끊임없이 빗대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왜 나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보았는지 부끄러워졌다.

내가 그들이 될 수 없고, 그들도 내가 될 수 없다.

나는 그들의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고, 그들도 내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결국엔 부럽긴 해도, 나는 그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그럴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에 좀 더 집중해보려 한다.

잘하지 못한다는 것, 돈벌이가 안 되는 재주라는 것에 또다시 주저앉겠지만,

조금씩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하자. 현재의 삶에 감사하자.




2021.8.24.

오늘은 개러지 밴드로 드럼도 찍어보았다가, 잠깐 소파에서 졸기도 했고, 짧은 글도 하나 완성했다.

쓰는 행위는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된다.

아무도 보지 않고 대답이 없어도, 내 안에서 토해낸 뜨거운 흔적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뭉클하다.

내 안에서는 무수히 가시가 박혀있던 덩어리가, 꺼내어지면 따뜻하고 말랑해져서 나를 위로하고 누군가를 위로한다.

글을 쓰기 전엔 몰랐던 참으로 신기한 경험 덕분에 이전보다 충만한 하루를 살고 있다.




2021.8.25.

나는 전화 공포증이 있다.

누구에게 전화가 오든 벨소리가 울리면 멈칫한다. 엄마에게 전화가 와도, 남편에게 전화가 와도 멈칫하며 몇 초간 화면을 바라보기만 한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는 찰나에 울리던 전화가 끊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먼저 다시 걸어야 하지만, 문자를 보내거나 대부분 다음에 올 전화를 기다린다.

그리고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 미안해 미안해요. 내가 잠시 다른 걸 하고 있었어. 화장실에 있었어. 벨소리를 못 들었어. 다음엔 좀 더 소리를 크게 해 놓을게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짐작 가는 이유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나의 이런 점을 아는 사람들은 최대한 나를 배려하기 위해 웬만한 대화는 카톡으로 주고받는다.

오늘은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지인에게 전화가 왔고, 벨소리가 울리자 또 잠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언제나 전화가 어색한 나는 들뜬 목소리로 아무 말을 내뱉었다. 물론 이번에도 몰랐겠지만.



그리고 오늘.


2021.8.26. PM 4:07

코로나 백신을 맞고 왔다.

화이자를 맞았다. 10분 거리의 병원으로 걸어가 오전 열한시에 맞았고, 15분 동안 경과를 지켜본 후 이상이 없어 다시 걸어서 집으로 왔다.

백신을 맞은 부분 주변으로 약간의 근육통만 느껴질 뿐, 너무나 멀쩡한 몸과 마음으로 라면에 밥을 말아먹고 이 글을 쓴다.


어제 저녁, 주변의 좋지 않은 사례들을 듣고 괜스레 겁을 먹은 나는 오랜만에 구글링을 했다.


아스트라제니카, 얀센은 아데노바이러스를 운반체로 하는 백신, 화이자와 모더나는 mRNA 백신이다.
그래서 아스트라제니카, 얀센은 냉장보관, 화이자와 모더나는 냉동보관이고 가격도 화이자와 모더나가 좀 더 비싸다.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혈전증은 주로 아스트라제니카, 얀센의 부작용. 내가 맞는 화이자 그리고 모더나의 부작용은 아나필락시스, 그러니까 급성 알레르기 반응.
아스트라제니카와 얀센은 화이자와 모더나보다 상대적으로 백신 효율이 낮다고 보고되어있는데, 임상을 진행한 시기와 변이정도, 지역이 달라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다.
다시, 네 가지 백신을 비슷한 시기와 지역에서 평가했을 때는 모두 80% 이상으로, 비슷한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청장년층의 경우 노년층보다 10% 정도, 화이자보다는 아스트라제니카가 두통, 근육통, 몸살, 오한 등의 증상이 더욱 많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백신감염을 완벽히 차단하기보다, 감염  일어날  있는 중대한 이상반응을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결론은 뭘 맞으나 비슷하다는 것이었고, 찾아본다고 겁이 난 마음이 달래지지는 않았다.

그저 이호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문득 생각날 뿐이었다.

‘남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백신 맞으러 가기 전 냉장고를 꽉꽉 채워 넣고 집안 청소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저 주변의 모두들 코로나 블루를 잘 이겨내고, 백신도 무탈히 맞고, 건강하길 바랄 뿐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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