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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니기리상 Sep 02. 2021

요즘은 몰라도 한때 직진 잘하던 그의 이야기

연애. 30일 에세이 두 번째.


 16년 전 만났던 그 사람은, 예술의 전당 앞 버스정류장에서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며 “내 옆에 왜 네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까”라고 말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14년 전 만났던 그 사람은, 연구실에 있던 내게 불쑥 나타나 곰장어만 덜렁 사 먹이고 혼자 집으로 가버렸다.

 10년 전 유학시절에 만났던 그 사람은, 한국 라면이 먹고 싶다는 내게 라면과 간식을 종류별로 가득 담아 보내주었다.

 9년 전 귀국해서 만났던 그 사람은, 음악을 좋아하는 내게 록 페스티벌 초대권을 선물했다. 자신은 일이 있어 못 간다고 했다. 좋아하는 밴드가 공연을 하자, 나는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제치고 무대 앞으로 뛰어나갔다. 땀냄새가 뒤섞인 북적거림 속에서도 이상하게 부대끼는 사람들이 없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땀범벅이 된 그가 내 뒤에 팔다리를 벌리고 서서 내내 나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8년 전 만났던 그 사람은, 내가 아프다고 하니 한 시간을 넘게 달려와 우리 집 문고리에 약을 걸어두고 갔다.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대화를 하자고 하면 내가 너무 예쁘다고만 했다.

 

 그는 그렇게 나에게 스며들었다. 그저 나의 말에 집중하고, 묵묵히 자신을 내어주는 부모 같은 사람이었다. 결혼까지 이어지는 연애를 한다면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우리의 연애는 8년 전에 시작되었고 7년 전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나를 이토록 소중히 대하는 사람과의 사소한 역사를 쌓는 과정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쉽게 타버려 흔적 없이 사라지는 불꽃은 화려하지만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천천히 타오르는 촛불에 녹아내린 양초는 이전보다 훨씬 그 형태가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며 숙연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저마다 촛불 같은 연애를 하고 촛농 같은 역사를 쌓았으면 좋겠다. 천천히 스며드는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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