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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니기리상 Sep 03. 2021

직장 말고 직업

직업. 30일 에세이 세 번째.


 이왕 그런 김에. 지금까지의 학업과 생업을 이어온 나날들을 이야기하는데 딱 그것만큼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고등학교 땐 이과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물학과로 진학했다. 이왕 공부를 하는 김에 연구실에 들어갔고, 이왕 연구실에 들어간 김에 운 좋게 유학길에 올랐다. 이왕 그런 김에 관련 분야의 회사를 들어갔고, 8년 차에 퇴사를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하지 못한 채 그저 기운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정해진 길은 넓고 확실했으며, 그것이 결국 이번 생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마치 사이즈가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오래달리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신발을 벗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어두운 숲을 지나고, 깊은 강을 건너 달리기를 계속했다. 뒤를 돌아보니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탓에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계속 달려야 할 것 같은 체념마저 들었다. 느리고 꼼꼼한 나는 치열하게 변화하는 회사와 맞지 않았다. 결국 승진 후 두 달을 더 다니고 퇴사했다.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기에, 더는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투쟁하여 일을 끌고 갈 자신이 없기도 했다. 18세, 진로를 정할 때 하고 싶은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한 대가로, 나는 18년 후에야 이 분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끄럽지만, 진로와 직업의 선택은 좀 더 신중해야 했다. 직업의 선택을 항해하는 배에 비유하자면, 월척을 낚을지, 멀미만 하다 내릴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결국 배를 타기 전에 승선 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니까 말이다. 첫 직장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인생 선배들의 조언에서, 결국 잘 선택해야 할 것은 첫 직 ‘장’이 아니라 첫 직 ‘업’이었다.


 ‘업’이라는 것. 사전적 의미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는 곧 의식주 해결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이 온전한 나로 살아나갈 방도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깨달음은 고꾸라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경향이 있어 약간은 서글프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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