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니기리상 Sep 15. 2021

게르마늄이 돼지막춤이 되는 마아법

소문. 30일 에세이 열다섯 번째.


 “저 사람이 알면 온 회사 사람들 다 아는 거야.” 늘 듣던 말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의도적인지 순수한 마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문제는 그로 인해 별스럽지 않던 일상의 이야기가 신화 급의 소설로 쓰여 모두에게 배포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들리지 않는 헤드폰을 쓰고 말하는 사람의 입 모양을 바라보며 단어를 맞추는 '고요 속의 외침' 게임에서 게르마늄이 돼지막춤이 되어버리는 진귀한 현상처럼, 대부분의 사실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될수록 전달자의 입장이 추가되거나 왜곡되어 갔다. 처음엔 있는 그대로 들으려 애를 쓰지만, 결국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어 가장 비슷한 단어를 건져 올린다. 다음, 그다음 사람도 같은 과정을 겪으며 애초의 사실은 잊혀가고 자극만 남는다. 순자가 말한 ‘현명한 자’에 이르기 전까지 소문은 멈추지 않지만, 전달자는 늘 자신이 최후의 전달자라고 착각하며 말한다.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


 그렇게 발 없이 퍼져나간 소문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가끔 황당한 조언을 듣기도 한다. “어쨌든 너의 정보는 너의 입에서 나온 거잖아. 말조심해야 해.” 이런 경우 말을 꺼낸 사람의 잘못일까, 말을 옮긴 사람의 잘못일까.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나의 정보가 돌아다니는 경우엔 도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마치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2차 가해자의 굴레를 보는 듯하다. 말하기를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소문의 근원을 최초 유포자에서 찾는다기보다는 원인 제공자에게서 찾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사실 원인 제공자라는 단어도 그리 적합하지 않다. 꺼내어서 득이 되지 못할 이야기일지라도 그것을 가십거리로 만들 권리는 대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누구나 정답을 알고 있지만, 누구나 쉽게 외면한다. 이 세상에서 ‘소문’이라는 단어는 영영 없어지지 않을지언정, ‘현명한 자’는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문을 즐기는 자도 결국엔 소문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역시 바느질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