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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강주 Mar 17. 2023

베를린에서

<2>


*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근 1년간 정말 자주 만났던 친구인데, 혼자 유럽에 갔을 때 친구에게 유럽 여행 사진과 함께 일기를 메시지로 보내주곤 했다. 그때의 채팅을 보니 잊었던 감정들이 새롭게 떠올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독일에 도착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지만 더 늦기 전에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진이 첨부된 기록들을 보면 그 순간의 향기와 감정들이 떠올라 좋다고, 많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다고 했다. 그걸 누군가에게 전해 놓으면, 나중에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 더 좋잖아. 친구에게서 길고 긴 답장이 왔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한 문장을 적어둔다.

 

‘ ... 나는 그저 노트처럼 그때그때의 감정들을 잘 흡수해주고 싶어.’

 

*

 

가끔 오른쪽 중지에서 촛불에 덴 것 같이 뜨거운 감각이 느껴진다.

 

*

 

아직도 궁금하다. 너는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왜 하필 그날 그랬어야만 했을까? 너를 깊이 알았던 것도, 깊게 좋아했던 것도 아니지만 내 주위를 둘러싼 일상이 너였기 때문에 나는 그 숲을 헤쳐 나오는 것이 너무나 버겁다. 너를 만날 수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너는 그렇게 가기에는 너무 총명한 사람이라고. 동시에 너무 멍청했다. 네가 그럴 줄 몰랐던 나도 멍청하다.

 

*

 

사람들은 예술가를 보고는 더러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한다. 창조적이고, 격식이 없고, 제한이 없고, 제약이 없고, 거짓이 없는 사람들. 욕을 하고, 발가벗거나, 화를 내다가도 웃는 그들을 보며 사람들은 예술하는 인간이라 그렇다며 이해해주고는 한다. 생각의 틀에서 벗어난 예술가들! 그래서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자유롭게 굴고는 한다. 나는 그런 예술가들이 재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

 

집에 아무런 생필품이 없기 때문에, 회색 수건 6개를 구매했다. 누구의 돌잔치를 축하하지도, 동창회를 기념하지도, 회사의 번창을 바라지도 않는 순수한 회색 수건들. 나만을 위해 구매한 아무런 글자가 없는 순수한 회색 수건들. 공장에서 갓 나와 백화점에 있었던 수건은 사실 더러웠다. 나는 새 수건의 세탁법을 몰랐기 때문에 샤워 후 몸을 닦을 때마다 회색 먼지들을 또다시 털어내야만 했다. 물기를 닦아내고 바디 로션을 바를 때마다 회색 먼지들이 뭉쳐져 온몸을 간지럽히곤 했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죽고 싶다. 회색 수건들을 다 불태우고 나도 죽고 싶다.

 

*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서시, 한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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