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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강주 Mar 16. 2023

베를린에서

<1>


*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 1년이 마치 3년과도 같이 길게만 느껴지는, 그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별 거 없고 지극히 평범한 인생이지만, 내가 갖고 있던 커다란 믿음들이 깨져버린 매서운 겨울이었다. 마음의 요동은 거대한 파도와도 같아 해변가에 있는 작은 초가집을 덮치는 것처럼 하루에 몇 번씩이고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중요한 시험마저 떨어지고 나서 우울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내게 엄마가 갑자기 달콤한 제안을 했다.

 

“너 시험에 붙으면 제주도에 간다고 했었지?”

“응. 제주도에 가서 일을 하려고 했지. 제주도를 좋아하니깐.”

“네가 시험에 떨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어. 분명 계시가 있는 거야.”

“계시라니? 무슨 종교라도 있는 사람처럼.”

 

물론 엄마는 아주 신실한 불교 신자이지만, 계시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분명 그것과는 멀었다. 형언할 수 없는 포근한 냄새가 가득한 목욕탕에서 엄마는 계속 말했다.

 

“독일은 학비가 아주 싸다고 하더라?”

“대학은 학비가 없다고 봐도 될걸?”

“그럼 너 독일 가.”

“보내주는 것처럼 말하네.”

“보내줄게.”

 

*

 

엄마는 베트남어를 배우러 다녔는데 수강생들과 저녁을 먹던 중 해외유학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다 독일은 학비가 없다는 말을 듣고 내가 독일에서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

 

나는 할 수만 있다면 항상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싶다. 같은 24시간이 주어졌어도 빌어먹을 나는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기억한다. 그래서 기록하고 싶다. 하지만 기억하는 만큼 기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남들보다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다. 이제는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감정과 같은 것들은 깜빡깜빡하곤 한다. 더 늦기 전에 기록을 시작해야겠다.

 

*

 

살면서 종교는 가져본 적이 없지만 가지고 있던 믿음 같은 것들이 몇 개 있다. 나는 돈은 없지만, 건강하다. 커다란 질병과 같은 것들은 내 인생에서 꽤나 무관하다. 혹은 이런 것도 있다. 나는 또래보다 약간 영리하며, 시험 운이 좋다. 이런 믿음들 중에는 부정적인 것들도 있다. 나는 결혼은 절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혹은 내 인생에 대학원이나 해외유학과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 별 것 없는 인생에서 별 것 없는 내 소중한 믿음들이 근 3개월 안에 다 깨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누구지? 내 배역에 혼란이 생겼다. 23년간 찍어온 인생이란 영화의 필름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

 

우리 삼 남매는 엄마 옆에 누워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엄마의 옆구리 깨에 누워 손을 가슴팍에 얹어 눈을 감는다. 안방의 냄새, 안방의 햇볕, 안방의 습기, 엄마의 살결과 같은 것들.

 

*

 

우리 집은 4월이 되면 직접 닭을 튀겨 대공원에 간다. 우리 집만의 소소한 벚꽃축제를 즐기는 방법이다. 막내 동생의 친구도 데려오고, 종종 외할머니 할아버지도 초대하고는 한다. 그런데 작년 4월에는 못 갔다. 전형적인 우리 부모님답게 거하게 싸운 후 몇 개월 동안이나 말을 안 했던 시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얼음판 같지도 않았다. 동생들과 나는 그러려니 하며 지냈다. 일어나야 했던 일이야. 알고 있었잖아. 이번엔 진짜 끝이야. 정말 이번에는 부모님이 이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옆에 누워 또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 가슴에 작은 혹이 느껴졌다.

 

*

 

5년 전쯤인가 그때부터 유행하는 말이 있다. ‘암 걸릴 것 같다’라는 말인데 무엇인가 답답하거나 화나는 일이 있을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그 말이 꺼림칙해 쓰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암환자 본인이나 암환자의 가족들이 불쾌하게 느낀다는 글을 보고 안 쓰길 잘했다고는 생각했다. 암 걸릴 것 같아. 암. 아아암. 다시 봐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다.

 

*

 

며칠 전에 친구와 통화를 하는데 혈액암이라는 암도 있다고 알려줬다. 웃기게도 빌어먹을 병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빌어먹게도 웃긴 병이거나. 그거나 그거나.

 

*

 

대체로 유년기에 대한 기억은 좋지 않은 편이다. 유년기를 생각하면, 어두워지는 초저녁의 여름 놀이터나, 술에 취한 아빠, 울고 있는 동생들과 화내는 나, 무기력한 엄마의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맥주병, 바이올린, 부러진 활, 비비탄 총, 파리채, 간장 계란밥, 참기름, 식빵과 케챱, 불량식품들, 송충이, 도서관 같은 것들. 기억과 함께 따라오는 감정들은 꽤나 강력해서, 생각만으로도 7살로 돌아간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멍청했다.

 

*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다. 글로 적고 보니 참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다. 나는 아빠를 사랑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빠는 내 거울 같아서 싫고 내 이정표 같아서 싫다. 아빠도 그랬겠지. 본인의 유년기를 보는 거 같아서 내가 싫었을 거다. 본인의 모습이 싫어 본인의 아버지를 따라 하는 청년 – 무한의 반복.

 

*

 

좋아하는 노래 중에,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 라는 노래가 있다.

 

내가 죽으려고 생각했던 것은 괭이갈매기가 부두에서 울었으니까.

내가 죽으려고 생각했던 것은 생일에 살구꽃이 피었으니까.

내가 죽으려고 생각했던 것은 신발끈이 풀렸으니까.

내가 죽으려고 생각했던 것은 차가운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죽고 싶은 이유 참 많기도 하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찮은 이유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대해 많은 의미를 두고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감상평을 봤다. 그 덧글을 보고 나서는 노래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상에 많은 의미를 두고 사는 거, 좋은 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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