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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강주 Mar 17. 2023

베를린에서

<3>


*


나는 원래 글자와 친한 인간이 아니다. 글을 읽을 줄은 알지만 오랜 시간 집중해서 읽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싫다. 어렸을 때부터 깨우친 지식들은 대부분 만화책을 통해서 배웠다. 종교 만화책, 고전 만화책, 사회과학 만화책들을 끼고 살았다. 그림을 좋아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상상력이 모자란 탓에 소설도 읽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시를 좋아하게 됐다. 시집을 종종 사서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울렁거리곤 했다. 정제된 단어들로 이루어진 시를 읽으면 머릿속에서는 단편영화들이 만들어졌다. 멋대로 상상하고 난 뒤에 작가에 대해 검색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과정이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혹은 중년인지 청년인지. 상상이 맞아도 틀려도, 그것은 굉장히 재밌었다.

 

*

 

친구의 집에서 제멋대로 만든 마라샹궈를 먹었다. 같이 장을 보고 생수병과 재료들을 나눠 들고 ‘아 이 동네 참 과천 같다’며 낄낄댔다. 이것저것 깍둑 썰어 넣어 재료들은 크기가 엉망진창이었고, 바닥에 눌어붙은 당면은 알고 보니 쌀국수였다. 우리가 만든 마라샹궈는 분명 못생겼다. 친구와 나는 웃기다고 사진을 왕창 찍었다.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그다음 주에는 친구가 우리 집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우리 동네도 과천 같거든, 창문을 고쳤으니 다음 주에 놀러 와.’

 

*

 

수수료가 꽤 크기 때문에, 1년 정도 머무를 계획인 나는 독일의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해야 했다.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직원 덕에 계좌 개설은 순조로웠다.

 

“당신은 영업일 기준으로 4일 뒤에 카드를 받을 거예요. 그 후에 카드 비밀번호 우편을 받을 거예요. 인터넷에서 계좌이체를 위한 어플을 다운 받으세요.”

 

다른 우편들은 일주일 동안 순차적으로 왔지만, 가장 중요한 카드를 받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계좌를 개설한 날에 통장과 계좌이체를 위한 비밀번호, 체크카드를 다 받을 수 있는데 대체 무슨 시스템이냔 말이야. 나는 2주가 지난 뒤에 다른 지점의 은행에 가서 말했다.

 

“2주 전에 계좌를 개설했어요. 다른 우편물들은 다 받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카드만 받지 못했어요. 확인해 줄 수 있을까요?”

 

컴퓨터로 이것저것 검색해 보더니 직원은 나보고 우편함에 내 이름이 제대로 기재되어 있냐고 물어보았다. 다른 우편물들은 다 왔는데 카드만 못 받았다니깐, 나는 속으로 울컥했다. 같은 대답을 하는 나에게 직원은 카드가 반송된 기록이 있다고 알려줬다.

 

“오늘 다시 카드와 새로 발급된 카드 비밀번호를 보내달라고 신청했어요. 카드가 3일 뒤에 도착하고 카드 비밀번호도 다시 발급될 예정이니 이번에는 그 두 개의 우편물을 가지고 은행에 와야 해요. 은행에서 등록을 해야 하거든요. 이해했죠?”

 

*

 

새로운 양말들을 몇 쌍 샀다. 새 양말이니 당연히 한 번씩 빨아서 신었다. 그런데도 벗을 때마다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에는 실밥들이 한가득 떨어져 나온다.

 

*

 

12월 중순부터는 도시에서 폭발음이 들리곤 했다. 전쟁이 난 건 아닌가 싶어 침대서 일어나 밖을 보는 일이 허다했다. 알고 보니 크리스마스, 연말과 연시를 축하하는 이 긴 연휴 속에서 사람들은 폭죽놀이를 즐겨하는데 그 소리가 이렇게도 크단다. 폭죽놀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막연한 공포는 사라졌지만, 일상의 균열을 깨는 굉음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며칠 전에는 동네를 잠깐 산책하는 길에 가까운 곳에서 폭죽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가 총에 맞은 줄 알았다. 잠시 죽은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일상이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초조한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

 

흑백필름의 도시와 차가운 바람

내가 알고 있는 혹은 모르는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은 나무들

하얀 머리의 중년들 안경 너머에 파란 눈

코의 피어싱 윤기가 흐르는 인조 털들

초록색의 자동차

빌딩 사이로 무리 지어 날아가는 새들

마치 쏟아져버린 잉크 같은

운하들, 강물들, 빗물들,

얼어붙은 시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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