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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어당 Mar 08. 2021

비땅

부지깽이의 전남 말

어려서 겨울은 매우 추웠던 기억이다. 기온이 지금보다 낮아서 추운 것도 있지만, 옷의 방한력도 지금보다 못했고 특히 난방이 취약하여 더 추웠다.


학교에서는 조그마한 쇠 난로에 나무를 태워 교실을 데웠지만 나무 사정이 좋지 않아 난로 바로 옆 몇 아이들과 도시락만 데울 정도였다.


학생들이 나무를 가져오거나 며칠에 한 번쯤 학교 뒷산에 나무를 주워와야 했다. 물론 집집마다 겨울이면 땔감을 구하는 게 일이었다. 소나무 잎이 떨어져 갈색 낙엽이 되면 갈퀴로 긁어모아 둥치를 만들어 지거나 여서 집까지 가져와야 했다.


또 죽은 나무나 나뭇가지를 낫으로 베어 지게로 집까지 나르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만, 학교에 다닐 정도면 대부분 나무를 하러 다녔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산에서 땔감을 구하니 마을 가까운 곳은 나무가 남아나지 않아 멀리 다녀야 했다. 그보다 어려움은 “산감”이라 불리는 산림감시원들을 피하는 것이었다.


산림녹화사업으로 가꿔놓은 산의 나무를 무단 벌채하면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집안 소유의 산이나 문중의 산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국유림에서 나무를 하다가 걸리면 형사처벌이나 벌금을 물게 되니 “산감”이라는 존재는 아이들에게는 상당히 무서운 존재였다.


그들을 본 적은 없지만,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서 들러온 그들은 우리에게 상당히 부풀려져 있어 상당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나무를 하다가 어떤 아이가 “산감이다” 소리치면 모두들 질겁했다.


어렵게 구해온 땔감은 밥을 짓거나, 소죽을 쑤거나, 군불을 때었다 쓰임이 많으니 빨리 없어져  집 사람 중 한 명은 하루에 한 번은 꼭 나무를 하러 가야 했다.


아궁이에 갈쿠나무를 넣고 성냥으로 불을 붙이면 금방 불이 붙는다. 그 위에 몇 번 더 갈쿠나무를 넣고 불 땀이 오르면 작은 나뭇가지를 위에 올린다.


차근차근 큰 나무를 올려 불을 세게 하고 아궁이 깊숙이 밀어 넣어 연기가 잘 빠져나가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면 불이 아궁이 밖 불 때는 사람에게 달려들고 연기 또한 부엌을 가득 채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비땅”이다. 뭐 특별한 것은 아니고 불에 잘 타지 않는 기다란 막대로 불을 뒤적이거나 나무를 밀어 넣을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지만. 형편이 나은 집에서는 쇠막대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불을 땔 때는 반드시 “비땅”이 필요하다.


불을 피울 때 나무를 들어 성냥불을 넣을 자리를 만들고 나무를 더 많이 넣었는데 불이 사그라지면 나무를 들어 산소공급을 해주기도 하고 불을 깊숙이 넣을 때도 유용하다.


국민학교 때 우리 학년에 양수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매우 순하고 말이 없는 아이로 우리 학교에서 가장 먼 마을에 살았는데 사촌동생이랑 같은 학년이어서 특이했다.


그 내들의 마을은 서쪽으로 신작로를 한참 걸어 마을 두 개를 거쳐 1번 국도를 횡단하여 산을 넘어 또 한참을 가야 하는 바닷가 마을이다. 마을은 집이 10여 정도로 작은 편이었고 우리 동급생이 4-5명으로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줄을 서서 등교하거나 하교할 때 가장 짧은 줄 중 하나여서 눈에 잘 띄었고 지나는 마을 아이들에게 상당한 시달림을 받았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애국조회라고 매주 월요일 전교생이 모두 운동장에 모여 교장선생의 훈화를 들어야 했다.


토요일에는 학생들 각자의 귀가하지 않고 마을별로 모여 고학년이 든 깃발을 앞세우고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마을 아이들이 많은 마을은 적은 마을에 장난을 걸었고 작은 마을 아이들은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또한 가까운 마을 아이들은 자기 마을 앞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멀리 살며 작은 마을 아이들은 이래저래 상당한 고초를 겪으며 귀가해야 하는 토요일은 그리 반가운 날은 아녔을 것이다.


특히 양수네 마을이 이런 곳으로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 어느 문중 제실이었다. 바닷가였지만 간척사업으로 바다를 잃어버리고 아직 염기가 빠지지 않은 갯벌은 황량했고 갈대와 부들만이 겨울 햇살에 빛났다.


양수 사촌동생이 친한 친구여서 양수의 성격에 대하여 들은 일이 있는데 그 친구가 이리 말이 없고 의욕이 없는 것은 “비땅” 때문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상당히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어렵고 힘든 삶이지만 그 친구의 사연은 어린 나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양수가 어느 겨울날 소죽을 쑤기 위해 불을 지핀 아궁이 앞에  앉아서 불을 때는데 밖에서는 친구들이 노는 소리가 들려 마음이 바빴는지 한번에 많은 양의 나무를 넣고 빨리 끓기를 기다리는데 불은 잘 들어가지 않았나 보다 이럴 때는 비땅으로 나무를 아랫부분을 들어줘 공기가 많이 들어가게 해야 한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하다 보면 나무로 된 비땅에도 불이 붙기 마련이다. 이럴 땐 옆에 있는 물동이에 담가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불을 끄고 다시 써야 한다.


물이 없으면 아궁이 맨바닥에 불타는 부분을 여러 번 긁어내 불을 끄면 된다. 불을 때다 보면 이러기를 여러 차례 해야 한다. 나무 비땅은 물론 쇠 비땅도 불에 벌겋게 달궈져서 불을 내기 쉽다.


그날 양수도 소죽을 다 쓰고 비땅에 불을 끄고 갈쿠나무에 꽂아두고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양수네 외양간에서 불이나 소가 타고 외양간이 무너졌단다.


그 후 양수 아버지가 화가 나서 양수를 때렸는데 동네 어른들이 뜯어말릴 정도였다니 무척 심하게 때렸나 보다. 이 이야기를 해준 친구도 자기 큰아버지가 그리 무서운 사람인 줄 몰랐단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활발했던 양수는 말이 없어지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게 되었단다. 국민학교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착한 양수와 무서운 아버지 그리고 “비땅”이라는 작은 물건에도 무언가 사연과 용도가 있다를 것을 알게 된 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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