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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어당 Mar 04. 2021

라디오

깊은 밤 청춘의 기억들...

어젯밤 잠이 오질 않아 침대 머리맡에 놓인 라디오를 켰다. 심야에 라디오를 듣는 것이 참 오랜만이다. 재즈풍 팝이 흘러나와 잊었던 감성을 자극한다. 오래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이 참 듣기 편하다. 지금의 디지털 기기들과는 다른 음색과 약간의 붕붕 거림이지만 익숙해서인지 오늘 라디오의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이 라디오를 얻게 된 것은 약 10여 전이다. 식당 주인이 지하에 버려둔 것을 얻어왔다. 어느 날 우연하게 내려간 식당 지하에 안테나도 부러져 없고 주파수 다이얼도 사라진 검은색 단파라디오가 눈에 띄어 전원을 켜보니 소리가 나질 않았다. 아마도 고장이나 이곳에 오랫동안 방치되었나 싶어 주인에게 물어보니 있는지 조차 몰랐다 한다. 주인에게 안 쓸 거면 나에게 양보해 달랬더니 흔쾌히 가져가란다. 자주 가는 식당이어서 고맙다 인사하고 가져왔다. 집에 돌아와 먼지를 닦고 건전지 함을 열어 오래된 전지를 꺼내니 누액이 있다. 건전지 함을 깨끗이 닦아내고 새 건전지 4개를 넣고 전원 스위치를 누르니 빨간불이 들어오며 “치익--” 하고 신호가 들어온다. 주파수를 맞추려는데 다이얼이 없으니 엄지와 검지로 작은 부분을 잡으려니 상당히 불편하다. 어렵게 FM 주파수를 하나 찾았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좋은 소리가 난다. 오래는 되었지만 그 시절 최신 기술을 사용한 라디오라서 인지 소리가 상당히 만족스럽다. 옆에 스위치를 음악으로 맞추니 더 풍부한 저음과 고음이 약간 붕붕거리며 들린다. 예전 라디오에는 뉴스와 음악을 택하는 스위치가 달린 것들이 있었다. 뉴스를 선택하면 사람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고 음악을 선택하면 풍부한 음색으로 노래를 들려준다. 작은 부분이지만 세심한 생각일 수도 있다. 한참을 듣다 보니 방향에 따라 잡음이 많이 섞인다. 안테나가 없는 탓이다. 안테나 부분을 살펴보니 안테나 연결 부분 나사가 그대로 인 것이 두 개로 만들어진 안테나 중 윗부분이 사려졌다. 여기에 작은 전선을 연결하니 한결 소리가 나아진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다. 타 전자서비스 찾아가 안테나를 찾는데 비슷한 게 없다. 오래된 전파사에도 없다. 할 수 없이 두꺼운 전선을 반드시 펴 라디오만큼 잘라 붙였다. 이렇게 안테나를 임시로 만들어주니 소리가 훨씬 낫다. 주파수도 잘 잡힌다. 하지만 주파수 선택 다이얼이 없어 불편하기에 몇 년을 한 곳에만 고정해 놓고 가끔씩 집에 듣거나 캠핑 갈 때는 항상 함께한다. 주파수 다이얼은 꼭 제짝을 찾아주리라 생각하고 여러 번 인터넷을 뒤지고 황학동을 찾아봤지만 비슷한 것을 못 찾았다. 그리 몇 년이 흐른 후 술자리에서 후배가 3D 프린터를 사서 여러 가지를 만들어 보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 순간 다이얼도 만들면 되겠다란 생각이 든다. 그 말을 들은 지 몇 달 만에 그 친구 작업실을 갈 일이 있어 라디오를 가져가 사정을 이야기하니 한번 해보자며 두고 가란다. 며칠이 지나 다됐다며 가져가라는 전화를 했다. 가서 보니 정말 제짝처럼 딱 맞는 크기로 제자리에 있다. 돌려보니 잘 돌아가며 주파수를 잘 찾는다. 색깔만 검은색으로 칠하면 된다며 웃길래 그냥 흰색으로 두자고 했다. 세월에 따라 제짝들을 잃어버린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새 흰색 다이얼과 구리전선 안테나가 이제 이 라디오의 제모습이다. 그 후 내방 책상 위 아니면 침대 머리맡에서 한 번쯤 손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이 라디오의 역할이었다. 가끔 건전지를 바꿔주며 한 번씩 틀어보지만 최신 음향기기 음색에 익숙해져 오래 듣질 못했다. 하지만 어젯밤에 들려준 음색은 아주 오랜 기억을 끄집어냈다. 늦은 시간까지 책을 보며 들었던 청춘의 깊은 울림을...


학교 가는 길 벚꽃 만발한 아름들이 벚나무길을 자전거로 달리면 꽃잎들이 날아와 입을 맞췄다. 그 분홍 꽃 비속으로 환하게 달릴 때면 꼭 어떤 미지의 터널로 데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런 설렘을 한가득 보듬고 다가온 봄은 초록이 빛을 더해 청록으로 바뀔 때를 지나 긴 비의 계절 잠깐 난 햇빛에 작은 웅덩이의 빛은 가녀린 떨림으로 다가왔다.


늦은 밤 스탠드 빛에 책을 보고 있노라면 빨간 작은 카세트라디오에선 언제나 음악이 흘렀다. 작은 지진 거림을 동반한 디제이의 목소리에선 조금은 들뜬 듯한 첫 멘트가 잘 어울렸다. 선선한 초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옥상에 누워 어둠과 별을 구별하며 웃었다.


라디오가 좋은 이유는 불현듯 들려주는 좋아하는 노래들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켠 라디오에서 거의 끝나가는 그 곡의 마지막 소절을 들을 때면 그 아이의 뒷모습만 본 것처럼 아쉬웠다. 한참을 듣다보면 어느 순간 또다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긴긴 기다림의 보답이었을까?


청춘의 시간은 짧고 황홀했다. 지금에야 알 수 있지만, 작은 달빛에도, 영화의 한 장면에도 감정의 곡선은 요동을 쳤다. 그 시절 아름다웠던 시간들이 음악 한 소절에 기억의 바다 깊은 곳에서 불현듯 떠오른다. 마치 때를 기다렸던 봄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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