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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언수프 May 30. 2019

5월, 집밥은 살아있다

언젠가 쓴 집밥에 대한 나의 생각



요즘 같은 세상에 '집밥'을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촌스러운 사람임을 보여 주는 것 아닐까 망설여지지만, 집밥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요즘 집밥을 자주 먹습니다. 혼자 먹어야 할 때도 있고, 엄마가 차려주시는 것을 함께 먹을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하고 같이 살면서 웬 새삼스런 집밥 소리냐고요? 우리 가족도 '요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 구성원의 모두가 각자의 사회적 역할에 몰두하는 우리 집에서 집밥은 제가 라면을 혼자 끓일수 있을 때 쯤부터 역할이 줄어들어 온 것 같습니다.

우선, 조금씩 철이 들면서 느끼는 것은 집밥 먹기, 어려운 것 같아요. <집밥 백선생> 이라는 요리 프로그램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TV 예능 프로그램이 현대인이 일상적으로 누릴 수 없는 영역을 보여 준다는 취지의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영역은 여행, 맛집 탐방이었다가 이제는 심지어 풍족한 연예인 가족의 육아 예능에 더해 집밥 만드는 일까지, 현대인에게는 더 이상 일상이 아닌 게 되어 버렸나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집밥 만들어 먹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재료를 골라서 사서, 직접 손질해서, 식탁에 올리기까지 드는 시간과 돈은 생업이 따로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많이 드는 것 같아요.


내가 오늘 집에서 김치찌개를 해 먹고 싶어요, 그러면 일단 맛있게 익은 김치가 있어야 하는데, 김치는 현실적으로 엄마표나 공장표 김치의 서포트를 얻는다 칩시다. 거기에 양파, 고춧가루, 다진 마늘에서 끝나면 좋겠지만, 맛있게 먹으려면 기름기 있는 돼지고기 부위나 스팸이나 아니면 참치캔이라도 있어야 하고, 냄비, 도마, 칼, 이런 도구들이 부엌에 다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에요. 저는 여기에 대파도 조금 넣고, 때에 따라서는 설탕도 한 스푼 정도 넣습니다.


저는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어서, 한식에 기본 재료라고 해도 될 법한 소금, 고춧가루, 씻어서 다듬어 놓은 대파, 다진 마늘, 멸치, 다시마... 언급도 다 못할 많은 재료들이 부엌 구석구석에 있어요. 그렇지만 몇십 년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신 엄마도 다 떨어진 식재료 준비해 두는 걸 잊으실 때가 있습니다. 근데 그걸 혼자나 둘이 사는 집에서 다 구비해 놓는다?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엄두가 안 납니다. 혹시 혼자 사시면서 평일에 집밥 해 드시는 분이 있다면, 저의 리스펙을 받아주세요.

스스로 만든 집밥, 그 맛은 어떤가요?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 낸 김치찌개는 엄마가 해 준 고등어 김치찜보다 맛없고, 백반집에서 파는 돼지김치찌개보다는 더 맛없습니다. 재료의 손질, 불을 사용하는 법, 간 맞추는 법, 몇십 번 몇백 번을 반복해 감각으로 익혀 오신 분들보다 당연히 서투릅니다. 저는 심심찮게 집에서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어 먹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호기로운 태도로 요리를 하곤 하는데, 그러던 스물일곱살 어느 때입니다. 제철을 맞은 꽃게를 사서 꽃게탕을 만들었습니다. 꽃게 등딱지와 아가미를 분리하며 손질하고, 감자, 두부, 양파를 다듬어 넣고 된장과 고춧가루를 풀고, 아주 의욕적으로요. 그 맛을 본 아빠의 웃음섞인 한 마디가 이거였습니다.


"네 나이 만큼의 맛이 난다."
잊혀지지 않는 순간입니다. 그 이후로 꽃게탕도 여러 번 다시 만들어 보고, 하여간 시도해 본 메뉴는 참 많았는데 그것이 다 맛있었는지는 정말 의문입니다.

집밥은, 한 상 차리기도 어렵고 심지어 남이 해준 음식보다 맛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밥을 만드는 데 의미가 있을까요? 떠올릴 수 있는 다양한 측면을 배제하고 개인적인 관점으로만 보면 이렇습니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이벤트'가 일어나면,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매우 여유있고 안정된 상태라고 판단합니다. 여기 있는 한 존재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주 좋은 컨디션이구나, 라는 걸 깨닫는 시그널이랄까요. 몸이 피곤하거나 머릿속이 복잡하면 무언가 만들어 먹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안 납니다. 귀가길에 김밥 한 줄 사먹고 말지, 밥 뜨고 반찬 꺼내 차리는 일조차 생각하기 싫으니까요. 그런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반찬가게가 잘 되는 이유가 있지 싶습니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야만 드디어 '이제 굴이 제철인데, 굴 파스타 해 먹을까?' 또는 '수제비는 한 번도 안 빚어 봤는데, 이번 주말엔 수제비를 도전해 볼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게다가 저는 손으로 뚝딱뚝딱 만드는 모든 종류의 일을 좋아합니다. 블록도 꽃도 색칠도, 최근에는 도자기 빚는 일도 너무 재미있었지만, 그 중에 내가 있는 환경에서 가장 하기 용이한 것은 아무래도 음식 만드는 일입니다. 그 날의 메뉴만 정해지면, 메뉴의 주재료만 집에 사 가면 됩니다. 식재료와 도구가 매우 잘 구비된 부모님 소유의 부엌이 있으니까요. 좋아하는 일을 잘 갖춰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여유는 생각보다 쉽게 주어지지 않잖아요.

이런 이유들로, 집밥을 만들어 먹는다는 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는 행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하지 않고 온전히 안정된 상태라는 것을 문득 확인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말에는 정말로, 처음이지만 수제비를 띄워 봐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낙지와 청양고추를 더해 칼칼하게, 아무래도 그다지 맛은 없겠지만요.


시대의 발명품 에어프라이어
아, 샐러드 만드는 것도 가끔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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