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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언수프 Apr 28. 2019

4월, 느린 봄맞이

나물만으로 차리는 식탁


4월 초순에 했던 일을 이제서야 정리해 보는 느린 봄맞이다.


봄 하면 벚꽃도 좋고 딸기도 좋고 다 좋은데, 이제는 입맛도 나이가 들었는지 봄나물이 세트로 함께 떠오르는 나이가 되었다. 수많은 나물 중에 무엇이 봄나물이고 무엇이 아닌 지 분간도 못하는 초짜이지만, 나물을 주로 해서 한 식탁 차려보고 싶다. 장을 보는 데는 우리 집 앞 마트만한 곳이 없다. 아무리 '슥'배송과 '마켓컬리'의 새벽 배송이 각광받는 시대라지만, 나는 아마 마트와 시장이 사라지는 언젠가까지 카트를 끌고 품목 구석구석 장을 보는 뒤처진 사람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봄에는 두릅이랑 달래를 많이 먹는데, 두릅은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는 거 말고는 뭘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마트 매대에 등장한 달래랑 참나물을 골라 볼까. 잠시 검색해 보니 참나물은 초가을부터가 제철이지만 이제는 어느 철이든 나오는 나물이라고 한다. 그래. 진짜 봄에만 새 생명을 틔우는 채소인지 아닌 지, 그게 그리 중요한가? 혼자 합리화하며.


'아줌마 입맛 다 됐네.'

생각한다.


전에는 씁쓸한 참나물을 왜 먹는지 몰랐다. 참나물까지 갈 것도 없이, 대충 '초록색 채소'는 다 불호에 가까웠던 것 같다. 식탁에 올라오는 풋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을 줄도 몰랐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쌈에 마늘을 넣을 줄도 몰랐다. 그런 짓을 왜 하지? 맵고 쓴데.


'아줌마' 입맛이라고 대충 뭉뚱그려 버리면 기분이 나쁠 뭇 아줌마들이 있겠지만, 내가 느끼는 입맛의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서투르나마 적당한 표현인 것 같다. 머릿속에 찰떡같이 떠오른 말이 있는데 굳이 '어른 입맛' 이라고 정제하는 건 솔직하지도 못하고. 도토리묵 정식이 맛있다는 한식당을 굳이 고르는 선택이라든가 팥, 단호박, 쑥으로 만든 케잌을 맛보며 느끼는 즐거움 같은 건 지금보다 몇년 전엔 조금도 공감할 줄 몰랐던 것들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입맛이 바뀌어 왔는지 모르겠지만 변화라는 건 보통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찾아오는 것 같다.


이십 대, 불과 3년 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스스로 차리는 '봄나물 식탁'이다.

마치 이 공간에 매달 쓰는 개인 프로젝트를 의식하듯, 그렇지만 기대감을 한껏 품으며 준비해 본 요리들.


파스타

알리오 올리오로 시작한 파스타를 거의 완성해 놓고, 잘 다듬은 달래와 참나물을 마지막에 숨만 살짝 죽도록 볶아내고 고춧가루를 약간 더한 파스타. 고춧가루가 그게 그거인 줄 알았는데, 엄마의 부엌에는 매운 고춧가루와 덜 매운 고춧가루가 다른 통에 구분되어 있다. 그것도 모르고 '매운' 고춧가루를 넣는 바람에 생각보다 매워졌다.


무침

같은 나물 재료에, 참기름, 고춧가루, 간장, 식초를 간해 보았다. 세상에 이런 쓴 나물을 자진해서 좋다고 먹는 날이 오는구나, 싶은 감정이 들게 한 가벼운 무침 요리.



발 빠른 사람들은 진작에 참나물 무침에 달래 된장국도 끓여 먹었을 테지만, 나는 돈 벌고 살아가는 데 정신 없으니까 딱 한 달 정도 늦게 제철 음식을 먹는 것쯤 면죄부를 받아도 되겠지. 게다가 기록으로 남기는 데에 또 한 달이 늦어졌지만 어떻게든 기록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어 한다.


내게는 별명이 있다. 신입 사원 연수 시절, 나는 배운 걸 알아듣는 것도 느렸고, 연수과정 통과하는 데도 꼴찌였는데 그래서 동기들이 '거북이'를 본따 붙여 준 별명이다. 기억 안 난다고 항변하지만, 나는 여럿이 모이기로 하면 준비해서 나오는 것조차도 느렸다고 하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다. 학생 때의 나는 그렇게 느리고 답답한 아이는 아니었는데 살다 보니 회사에서의 성취든, 연애든 뭐든 중간만 하는 것도 쉬운 건 아니었다. 나는 왜 남들보다 뒤처지나, 아니 왜 중간만 하는 것도 이리 할 일이 많은가, 버둥거리며 지낸 것도 한참이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또 그런대로 살만 한 것 같다.


뭐든 조금씩 느린 듯하지만 스스로 준비한 모든 것들을 가장 좋은 때에 만끽할 수 있는 내가 되길.

좋은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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