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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언수프 Jun 30. 2019

6월 평범한 날들의 조금 특별한 식사, 돼지갈비

가족 식사에 특화된 이 메뉴


돼지갈비를 어떨 때 먹는 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조금 어른들이 좋아하는 메뉴라는 인식이 있다. 회식 자리에서 삼겹살집이 아닌 돼지갈비집을 굳이 찾아가는 일은 없고,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데이트 때에도 역시 비슷하다. 상당히 가족의 식사에 특화된 메뉴인 것 같기도 하다.

돼지갈비를 먹을 때면, 나는 언제나 수능 시험을 치르고 집에서 먹었던 조용한 저녁식사가 떠오른다.

2006년 11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었다.
원래부터 수리영역에 약했던 나는, 그 해에 수리 나형은 너무나 쉬웠다는 언론 보도에도 불구하고 점수가 기대처럼 좋지는 않았다. 시험 시간에 풀고 답안을 낼 때는 마치 만점일 것만 같았는데. 역시, 행운의 여신 같은 건 없었다. 인생의 진리는 생각보다 어릴 때 힌트를 보여주는 법인데, 이제야 깨달은 것 마냥.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가답안이 유명 입시 학원의 강사 풀이를 통해서 바로바로 올라오곤 했다.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할 때 즈음 수리영역 가답안이 나와 채점을 할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장에 미용실에도 가고 번화가의 노래방이며 레스토랑에 가서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겠다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나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씁쓸하다고도 할 수 없고, 우울하다고도 허탈하다고도 할 수 없는, 아무 것도 아닌 듯한 기분이 되어 식탁에 겨우 앉았다. 그저 뭔가 매우 큰 일을 끝냈다는 느낌이었다. 수능 이후로 그런 기분은 오래 지속되었다.

우리집은 중요한 일, 기쁜 일이 있을 때면 자연스러운 일인 듯 돼지갈비가 식탁에 오르는 것 같다. 그 날의 저녁식사에도 돼지갈비가 올랐다. 수능날의 돼지갈비는 내가 먹고 싶다고 한 건 분명 아니었고 부모님의 취향껏 선택하셨으리라 짐작한다. 학생 때의 나는 음식에 취향이란 없었고, 수능을 앞둔 자녀에게 "끝나고 저녁은 뭘 먹으러 갈까?" 하는 것도 너무 드라마틱하게 천진한 발상이라.


아무튼, 얼마 전 우리 가족은 또 중요한 일을 치르게 되어 동네 돼지갈비집에 갔다. 대놓고 가족 앞에서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나는 우리 집안 조상님들의 어디쯤엔가부터 '역마'의 기운이 쎄게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다. 역마살의 대는 우리 아빠 세대에 내려와서 절정으로 작용하여 분명 이제는 은퇴하실 시점이라고 믿었던 지금, 아빠는 다시 서울을 떠나 알제리로 가시게 됐다.

이전 회사에서보다 좋은 직함을 달고, 나이가 들어도 계속해서 찾아주는 곳이 있다는 건 백세인생에서 꽤나 좋은 일이긴 하지만, 아빠는 지치지 않는 걸까. 사실은 조금 산업 역군으로서의 역할은 이제 그만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놈의 '돈', 아니 가처분소득이란 건 무서운 거라, 은퇴 직전 몇 년의 고정적인 수입원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거다. 그럴 거면 소갈비를 먹으러 가도 됐을 텐데, 일생을 평범하게 살아온 가족에게 소갈비는 심리적으로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 적부터 그렇게 아빠는 가깝게는 중국과 방글라데시, 멀게는 알제리, 콜롬비아 등 여기다 모두 적을 수도 없는 많은 나라를 떠돌며 생활하셨다. 몇 년 간의 해외현장 근무, 그 중간에 휴가 두어 번, 한국으로 복귀해서 몇 개월에서 몇 년, 그리고 다시 해외 근무. 십수 년을 이 패턴으로 지내 온 우리 가족은 아빠가 해외 근무를 나가실 때, 휴가를 들어왔다 다시 나가실 때가 나름의 중요한 이벤트라, 이 때만큼은 아빠가 원하는 메뉴로 저녁 식사를 해결하는 게 관례처럼 되었다. 드시고 싶다는 메뉴에는 정해진 레파토리가 있는데, 한 번은 돼지갈비이고 또 한 번은 생선회다. 여기서 벗어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알제리로 떠나시기 전날의 마지막 가족 식사도 돼지갈비였다.
아빠는 인생은 참 모른다며 웃으셨다. 업계에서도 너무 특수한 직무라 남들보다 해외 근무도 잦았고, 예기치 않게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너무 특수해서인지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이가 들어도 찾아주는 곳이 있다며.


이런 일로 돼지갈비를 먹을 날이 이제는 없을 것 같았는데, 정말 아무리 평범한 삶이라도 사는 건 모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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