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미나게 본 프로그램이 있다. 채널A의 '굿피플'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변호사 지망생들의 로펌 인턴 생활기와 로펌 변호사들의 모습을 그려 냈다. 30분이 넘어가는 TV프로그램은 쇼와 드라마를 막론하고 집중을 잘 하지 못하는데 이 프로그램은 완결을 내면서 그토록 좋아한 이유는, 추억이 된 수 년 전 나의 '처음', 멋진 법조인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 때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열정' 때문이었다.
나는 학창 시절에 시험 공부를 하느라 밤을 지새워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평범한 동네의 우수한 학생이어서 그래도 됐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정말 학업능력이 비슷비슷한 애들만 모아 놓은 곳이라 훨씬 더 치열해져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되는 대로 공부하다가 '어차피 나는 밤샐 체력도 안되고, 이 정도밖에 공부를 못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이 정도 학점도 만족해.' 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송 인턴의 스토리가 정말 마음 깊이 다가왔다.
이 못난 자기합리화, 또는 '우아한 척'은 사회생활에까지 이어져서, 지금까지 내게는 자발적으로 야근하며 소스를 미친 듯 분석하거나 개발한 경험이 없고, 야근은 업무 스케줄 상 불가피할 때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 여긴다. 이렇게 남들보다 열정 에너지가 적은 나로서는, 내게서는 찾지 못한 그들의 열정이라는 재능을 부러워하는 일이 재미있었던 거다.
정말 놀라운 건 멘토인 권 변호사의 마인드셋이었다. '이 지구에서 내가 남들보다 크게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구나, 라는 걸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게 곧 어른이 된다는 것' 이라는 생각은 평소의 내 가치관과 비슷했다. 그런데 이 사고를 어떻게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지? 라고 느낀 건 그 다음 순간이었다. 나는 의외로 평범한 사람이니까, 이 정도면 충분해, 괜찮아, 라며 '우아한 척' 하기보다 더 치열해도 되고 아둥바둥해도 된다는 말. 권 변호사의 그 말은 조금 충격으로 다가와서 화면을 쳐다보는 당시에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 있는데, 뭐든지 보통보다 좀 잘해 보인다는 거다. 잘해 보이는 이유는 명확하게는 모르겠는데 그냥 성실해 보이는 외모와 행동거지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이것 때문에 현실과의 괴리를 느낄 때가 많다. 나는 대학 시절에 학점 좋은 친구들과 친했을 뿐 정작 내 학점은 엉망이었고, 어쩌다 파일럿 대상자로 뽑혀서 본 사내 기술 테스트 때문에 기술역량이 좋은 직원처럼 보이지만 테스트 레벨은 몇 년 째 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팀장이야말로 내 상태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일 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실 엉망인데, 까 보면 엉망인 걸 언제라도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아둥바둥 어떻게든 분투하면서 현실과 겉모습의 괴리를 좁히는 게 아니라, '이 정도면 괜찮아, 현상유지.' 하면서 민낯을 안 들키려고 하는 내 모습이 뒤늦게 떠올라 그 장면이 이해가 됐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거다. 더 고민하고 열심히 하는 그 열정은 정말 멋진 거다. 야근이 싫고 한 가지 일을 오래 붙들고 있는 게 스트레스인 이유는 내가 잘 못해서 이러는 것만 같고 그걸 받아들이기 싫어서다. 내 모습이 안 괜찮아 보이면 어떻고, 좀 못 하면 어떤가. 더 잘 하려고, 뭔가 결과물을 내려고 나는 이 시간 이 자리에 입술을 뜯으며 욕지기를 뱉으며 앉아 있는 거다. 그래서 결과물이 더 좋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 큰 소리로 불평할 테다. 아, 나는 진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다고.
지금까지 '열정 없이 살았습니다'라는 걸 이렇게 장황하게 쓴 글이었으며, 나는 다시 엉덩이를 붙이러 간다. 좋아하는 일에 붙이면 더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