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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언수프 Nov 24. 2018

11월 찬바람 불어오는 계절, 바지락 수제비

당신에게 수제비는 어떤 음식인가요?


바지락 수제비를 11월의 소재로 삼게 된 건, 얼마 전 개인적으로 작성했던 '집밥'에 대한 때문이었다. 집에서 만들 수 있는 아무런 음식이나 가져다 써도 상관 없었지만,
'나 요즘 수제비를 너무 먹고 싶단 말이야!' 하는 나의 답정너 기질 덕분에 글의 마무리가 수제비로 끝나 버린 게 문제였다.

결론은, 나는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나 좀 한가해.' 싶어야만 하는 일, 그리고 다행히 태생이 '똥손'이 아니라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 바로 집밥을 비롯 음식 만드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그 글을 공개한 주말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수제비를 직접 띄워 보았다.

어릴 때 종종 손에 밀가루 반죽을 쥐여 준 엄마를 따라 끓는 육수에 퐁당, 퐁당 뜯어 넣어본 수제비 요리 이력의 전부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식탁에 올라왔지만, 나중에야 사실은 수제비가 싫다는 엄마의 고백과 함께 집에서 수제비 먹을 일이 사라졌다. 단순히 아빠가 좋아하는 메뉴라서 해 주는 거였는데 왠지 모르게 어릴 적 풍경이 떠오른다고 했다.

부모님은 60년대 초반 생이어서 전후 시절과 아주 가깝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아직 못 살던 시대, 밀가루 반죽에 감자와 김치를 많이 넣어 어떻게든 양을 늘려서 끓이다 푹 퍼져 버린 그런 수제비가 생각난다는 게 이유였다. 그냥 밀가루 반죽이라 몸에 좋지도 않다는 말과 함께.

학창 시절에 단체 급식으로 면과 소스가 퉁퉁 불은 토마토 스파게티가 나오는 날이 끔찍이 싫었다. 배가 고프면 아무 것도 못하는 연비 나쁜 몸만 아니었더라면 점심을 굶었을 테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따지면 필연적인 결과물이었지만 그 스파게티에는 맛도 정성도 부족했다. 지금은 다행히 토마토 파스타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엄마가 수제비를 싫어하는 건 내 토마스파게티의 기억과 같은 맥락이려나, 잠시 생각하고 그만뒀다.

어쨌든 처음 해 보는 일이나 마찬가지라, 수제비 반죽 만들기, 수제비 육수, 별별 키워드를 다 넣어서 검색을 돌려 본다. 밀가루에 물 섞고 잘 치대서 재워 놓고 육수는 집에 있는 멸치 다시마로 하면 되겠지, 한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 레시피를 머릿 속에 우겨넣으며 마트에 들어간다.

낙지가 철이 아니라서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못 했다. 하는 수 없이 바지락을 카트에 넣는다. 사실은 낙지에 청양고추까지 넣어 목구멍 찢어지게 시원하게 먹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메뉴가 갑자기 바지락 수제비로 바뀐다.
쫄깃하게 감자수제비 반죽을 할 수 있음 좋겠다, 하며 매대를 구경하다, '수제비용 밀가루'라고 해서 C사에서 나온 감자 전분 약 15% 섞인 밀가루가 상품으로 진열돼 있는 걸 발견했다.


'정말, 세상 대박 좋아졌다!'
속으로 외쳤다. 게다가 반죽은 팬케이크 반죽이든, 김치부침개 반죽이든 간에 물의 양이 고뇌의 원인, 망침의 원흉이 된다. 그런데 이 상품은 포장 겉면에 <500g 수제비용 밀가루에 물 170ml를 넣으세요.> 라고 까지 적혀 있으니 이거 완전 땡큐다.

정량으로 계산된 완벽한 반죽을 손으로 주무른다.
생각보다 팔 힘이 많이 들어간다. 벌써 힘들다, 괜히 음식 한다고 오바했다, 생각하며 반죽을 계속 치댄다.
색깔에도 욕심 내고픈 게 사람 마음인지라, 차마 단호박이나 당근 즙 같은 걸 낼 엄두는 안 나고 대신 녹색 반죽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에 집에 있던 모링가 분말을 섞었더니 제법 색이 잘 나온다.
하얀 반죽 하나, 녹색 반죽 하나가 완성된다.


그날 저녁 본격적인 과정이 시작되었다.
멸치 다시마, 다진 마늘 그리고 새우젓을 우려내 끓인 육수에, 딱딱해서 천천히 익는 채소부터 먼저 넣는다.
이미 수제비 반죽 만드느라 힘이 빠져서 이것저것 많이 넣기 귀찮아져 감자, 당근, 청양고추만 썰었다. 당근을 굳이 찾아내 조금 썰어낸 것은 노란빛 반죽을 만들지 못한 것을 대신해 뭐라도 하자는 심정이었다.
채소를 넣으면서, 미리 해감해 둔 ㅡ 레시피를 읽을 때 이 표현만큼 불친절한 것도 없다고 여겼는데 내가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만다 ㅡ 바지락도 전부 쏟아 넣었다. 바지락을 먼저 넣어 육수를 냈어야 하나?
한번 푹 끓어서 채소 색깔이 조금 투명해진 듯 할 때부터 반죽을 떼어 넣는다. 문득, 수제비 반죽은 센 불에서 빨리 떼어내 끓여야 한다던 어느 블로거의 코멘트가 떠오른다. 게다가 얇게 떼어내야 속까지 잘 익고 쫀득하다는데, 제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온 수제비 반죽은 마음이 급한 초심자의 손을 떠나 버린다.

손에 착착 붙는 반죽 떼어내는 게 너무 재미있다. 다 큰 어른도 재밌는걸 아이들은 진짜 얼마나 좋아할까?
그래서 우리 엄마도 귀찮고 부대끼지만 우리에게 수제비 반죽을 조금씩이나마 쥐여 줬을까?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엄마의 엄마가 수제비를 끓일 적엔 지금의 나처럼 즐겁기도 했을까, 의무적이었을까, 아님 반죽을 얼마나 더 많이 해야 할걱정했을까?

철 덜 든 미혼만 할 수 있는 대단히 관찰자적인 시점의 상상을 하며, 간을 맞추려 굵은 소금을 이따금 뿌려 넣는다. 고작 수제비 한 냄비 끓이는 거면서 머릿속에 물음표가 수없이 왔다가 사라진다.

수제비를 만들면서 옆 불에서 함께 졸인 달걀 장조림도 같이 식탁 위에 올렸더니, 빛깔이 그럴듯하다. 불어오는 찬 바람에 시달리기 시작한 위장과 기관지가 뜨겁게 더워졌다가 시원했다가, 청양고추의 매운맛이 목구멍을 화끈하게 아리게 한다.

사실은 수제비를 싫어한다던 엄마가 한 마디 건넨다.
"야, 맛있다. 육수는 뭐 넣고 끓였어?"

뒤늦게야 수제비가 엄마에게 전과는 다른 의미로 기억되었으면 싶어진다. 가성비 만점이었던 어릴 적 끼니가 아닌, 좀 허둥대지만 가족의 손으로 만들어 준 집밥의 의미로.
남은 반죽이 냉동실에 잠들어 있다. 추운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 수제비 한 그릇은 더 먹을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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