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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언수프 Dec 09. 2018

12월, 내가 나온 날의 미역국

생일을 기념하는 또 다른 방법

나는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엄마가 산고를 겪고 아빠는 아빠가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1988년 크리스마스의 그 산부인과 풍경은 어땠을까, 이맘때면 꽤나 자주 상상해보곤 한다.

크리스마스에 태어났으니, 어릴 때 선물을 2개씩 받았겠네, 생일파티를 크게 하지 않았니? 하는 질문들을 받는다. 그렇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 생일은 언제예요" 이야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어릴 때 생일로써 그다지 관심받지 못했다. 한 학년을 마치고 방학 때 맞이하는 날이므로. 학교를 다니며 가장 생일로써 주목을 많이 받는 아이들은 단연 4,5월 꽃피는 봄날이 생일인 아이들이라고 나는 마음 속으로 주장해 왔는데, 내 학창시절은 진짜 그랬다. 한창 친해지는 시기, 아이들은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으니까. 그런 아이들을 제외하면 생일이라는 게 특별히 의미가 있었나 싶다.

심지어 지금 다니는 회사의 신입사원 때는 생일날 낮에 당직을 섰다. 오전 아홉시부터, 밤 아홉시까지. 다른 사람과 당직을 바꿀까도 싶었지만 그때 나는 '에이 신입사원 주제에 어떻게.' 하고 말았던 소심이었다. 남들처럼 생각하면 별로 특별한 날이 아닌데, 그날은 '당직 어떻게 하지, 별로 아는 것도 없는데, 크리스마스인데, 나 생일인데...' 하는 감정이 쌓이면서 내내 씁쓸한 기분으로 당직석을 지켰다. 그렇게 스물다섯 살 생일은 잊을 수 없는 생일이 되어 버렸다. 그 해 12월 당직 스케줄 짠 상사가 누군지 기억하고, 난 그 분을 아직도 별로 안 좋아한다.



'생일이 점점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


나이가 차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친구와 지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잊을 수 없는 몇 해의 생일을 빼고는 크리스마스 생인 나도 점점 생일따위, 하게 되는 건 분명히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아직까지는 생일이 특별하여 축하받아야 할 날이었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은, 이 글을 쓰면서 읽는 스스로에게 생일 말고도 무엇이든 먼저 받고자 하고 있다면 그만 그런 것에서 벗어나자고 말하고 싶다. 무엇인가 받으려 기대하는 마음을 내려놓기란 참 어렵다. 그래도 생일을 빌미로 축하받고 사랑받아야지, 하는 식상한 관점 말고 다른 포인트를 찾아내 보자고.

나이를 먹어가며 사회와 시스템에서 배운 건 아쉽게도 충분한 사랑, 인정, 보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내가 기대하고 노력해 온 만큼 보상받지 못한 경험, 인생 전체로 보면 고작 스쳐가는 이에게 상처받은 결과로 다음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법, 같은 것들이 의외로 성장하며 얻은 것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 기대 같은 건 접어 두고, 생일인 김에 나 왜 태어났는지, 앞으로 어찌 살 건지 생각하는 게 더 도움이 될 테니 그렇게 해 보려는 거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아 내가 태어난 날에 가족이 곁에 있었고 많은 사랑과 축복을 받았다.
엄마가 아빠를 자랑할 때면 빠지지 않는 레파토리가 하나 있다. 나를 낳고 입원해 있을 때, 어디서 구했는지 병원 외부에서 미역국을 냄비째로 사다 병실로 나르더라는 아빠 모습, 그걸 아직도 종종 자랑하신다. 조금 새는 얘기지만, 이런 걸 보면 정말 여자의 임신과 출산 때 기억은 정말로, 정말로 오래 가는 것 같다. 어쨌든 세상에 나와서 자지러지게 울었고 엄마가 미역국을 끼니마다 지치도록 먹었을 그 장면을 어렴풋이 상상하면 나는 이상하게도 '대충 살지 말아야지.' 생각하게 된다.

그 미역국을 시작으로 부모님은 나를 한 사람의 사회인 구실을 할 수 있게 키워내셨다. 물론 밖에서 일과 사람에 치여 돌아와 집에서 울거나 무기력하게 있곤 하는 감정적 움직임은 학교 다닐 때보다 지금 더 진폭이 크다. 변명하자면 이건 내 성격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안으로만 삭히다 병나던 성격을 그나마 밖으로 꺼낼 줄 알게 되어서 그런 거다. 아무튼, 난 못나게도 아직 성장 중이다.

개발자 나부랭이로서 고객사 갑님 말마따나 '이딴 일 하려고' 사는 건가 싶을 때도 없지는 않지만, 세상에 나온 이상 살아지는 대로 살기에는 한 번 뿐인 삶이 너무 아깝다.
우리, 아무리 사는 게 팍팍하여 상처투성이 될 지라도, 하루하루가 너무나 일상적이라 지겨운 날들이라도 막 살지는 말자. 나는 영혼있게 살고 싶다. 내가 세상에 나온 언젠가 미역국을 끓였고 먹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분명히 미역국 끓이신다고 굴도 잔뜩 사 두셨는데. 다 끓여다 먹었나. 내가 하기는 귀찮다.
난 미역국 잘 못 끓이고, 사실 미역국 내 손으로 직접 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새로 출시된 오뚜기 미역국 라면을 시도해 본다.
이거 맛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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