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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언수프 Nov 13. 2018

10월, 리틀 포레스트 밤 조림

밤 조림, 또는 보늬밤

여러 번 보아도 지겹지 않은 영화가 있다.

조금 재미없는 취향일지 모르지만 나는 봤던 영화를 또 보는 걸 좋아한다.

좋아하는 영화를 제대로 기억 못 해서 다시 보는 주제에 집중하지도 않으면서,

화면을 흘려보내며 내가 좋아했던 장면만은 놓치지 않는 그런 걸 한다.

요즘은 <리틀 포레스트>가 그 대상이다.

개봉 시기에 영화관에서 한 번, 여름휴가 다녀올 때 비행기에 갇혀 오며가며 두 번,

그리고 추석 특선 영화로 또 한 번.


혜원이 밤을 주우러 가을 산에 간다.

가을 산에는 곰이 나타난다는 어릴 적 무서운 이야기를 곱씹으며 밤을 줍는 혜원을 보며,

'요즘 같으면 곰보다는 괴한이 나타날까 무서울텐데.' 라고 생각한다.

혜원은 주워온 밤을 일일이 속껍질을 살려 다듬는다. 베이킹소다에 하루 재우고, 다음날 세 번을 삶고, 다듬고 설탕을 부어 또 졸인다. 그렇게 시간을 들인 달달한 밤을, 함께 졸인 설탕물에 재워 보관한다.

이 밤 조림이 일본 원작 <리틀 포레스트>에는 마을 사람들의 창작 레시피 대결처럼 재미있게 표현됐다.


이미 세 번이나 본 영화를 늘어지게 거실에서 보는데 아빠가 슬쩍 건넨다.

"밤 조림, 저거 먹어 보고 싶다."

답정너 같은 우리 아빠.

시중에 저런 밤 조림을 팔 리가 없으니, 해 먹고 싶다는 얘기다.

근데, 저 장면을 볼 때마다 나도 궁금하긴 했다. 밤 조림이라는 거 먹어 본 적이 없으니까.



집에서 멀지 않은 산에 밤 주워도 되는 스팟이 있다는 엄마의 말이 나온다. 일이 커진다.

밤 조림 얘기가 나온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손에 집게를 들고, 머리에는 모자를 썼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한 건 아닌데, 아니 밤이야 사면 되는데, 난 무엇에 이끌렸나.

가을 산에는 메뚜기와 떨어진 도토리와 밤송이 천지였다. 곰보다는 실종자가 산에서 유해로 발견된다든가 하는 영화 장면이 생각나는게 더 무서웠다. 낙엽 소리와 쓰레기 더미에 흠칫 놀라면서도 줍다 보니 욕심이 났는지, 대체 누가 다 먹으라고 우리가 주운 밤이 5키로나 됐다.


저녁에 캔맥주를 까 놓고, 칼을 들어 생밤을 깐다.


칼질에 서툰 나는 여러 번 손을 휘두르다, 어느 순간 밤 까는 기계가 됐다. 산에서 주워 온 햇밤을 일일이 까면서 아빠와 나 사이에 설전같은 농담이 오간다.

'밤조림을 해 먹자는 건 아니었다.'는 주장은 같지만 둘 다 근거가 약하다. 먹고 싶다는 얘기는 아빠가 했고, 베이킹소다를 사온 건 나였다.

게다가 밤은 같이 주웠다.


밤을 까다 보니 생각없는 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마치 털실 뜨개질할 때 기분, 도서관에 새로 입고된 책에 도난방지태그를 붙이는 일을 할 때 기분 같다.

잠시 디지털 모드를 꺼 두고 가끔 이렇게 아날로그적인 일을 한다면, 조금 단조롭기야 하겠지만 얼마나 마음이 고요해질까. 마음을 안심시키려고 보는 수많은 디지털 신호가 내 마음을 더 복잡하게 하니까. 알면서도 나는 그걸 반복하니까.


처음 생밤을 삶을 때 나는 소리는 가을 산의 낙엽이 바람에 수없이 흩날리는 소리 같다.

쏴아아, 쏴아아아.

삶아낸 물은 검붉은 물감을 진하게 풀어낸 것 같았다가, 횟수를 거듭하며 와인 같은 영롱한 색을 띤다.


영화 속 영상처럼 예쁘게 삶아지지는 않았다.

어떤 건 속껍질이 제멋대로 벗겨지고, 무거워서인지 뜨거워서인지 속살을 드러내며 터진 밤도 많다.


마지막, 설탕을 밤 무게의 반만큼 붓고 졸여내는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진다.

그동안 나는 책을 읽으며 문장에 밑줄도 쳤다가, 유튜브를 보며 커피도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설탕물이 반쯤 남을 때까지만 기다리면 맛있는 디저트를 맛볼 수 있다.

달달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이 정도 졸이면 됐을까, 아까 발견한 터진 녀석들을 먼저 꺼내 맛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을 거쳐 만들어진 디저트라 생각하니, 어쩐지 맛있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어쨌든 맛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함께 생긴다. 뭐,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주전부리보다 몸에도 좋겠지.

리틀 포레스트가 나에게 리틀 포레스트를 선물한다.

'리틀 포레스트 밤 조림', 얼마나 재워 두면 제일 맛있을까.


가을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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