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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언수프 Jan 04. 2021

30대, 그 언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먹을 것 없는 이야기



나는 대학생이 됐을 즈음부터 서른 살, 30대가 된 내 모습을 종종 상상했다.

살아 보지 않은 삶을 그리는 건 정말 쉽지가 않아서 대충 정장을 입고 회사를 다니고, 아마 결혼도 했겠지, 결혼을 했으면 일을 안 하고 있을까? - 그때 사상은 딱 이정도 수준이었다 - 정도의 상상에 그쳤던 것 같다. 그 상상은 그저 하나 하나의 파편이었지, 결혼했고 아이도 있을지도 모르고, 싱글일지도 모르는 30대 커리어우먼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연결된 삶으로 떠올리는 건 한계가 있었다.


직장생활을 해본 적 없는 대학생이 제일 쉽게 접할 수 있는 건 티비 속 아나운서들이었다.

아무리 남초과라지만, 같은 과를 졸업하고 일하며 결혼도 한 여자 선배들이 현실에는 수두룩빽빽하게 많았을 텐데, 그런 모습을 파편적으로나마 보여줄 수 있는 04학번, 05학번, 등등의 선배들은 학년이 올라갈 수록 학교 생활에서 자취를 감췄다. 취업을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카톡 친구목록을 훑어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 '선배들은 다 어디 갔지' 라는 거였다.


형제 서열의 첫째로서 사는 삶은, 정확하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막내와는 다른 고충이 있다. 바로 '레퍼런스가 없다'는 것. 이런 게 고충이라는 걸 모르고 살다가 어렴풋이 깨달은 건 동생이 먼저 결혼을 하고, 그 다음 해에 내가 결혼 준비를 하면서부터다.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궁금한 게 많고 해보면 별 것도 아닌 걸 '나보다 먼저 해결해 본' 존재한테 의지하니까 되게 좋은데, 난 지난 3x년간 이 편리함을 모르고 살았다니.


아무튼 레퍼런스, 참고 자료는 중요하다. 그런 게 없다 보니 무작정 쉽게 티비에서 볼 수 있는 '예쁘고, 잘 가꾸고, 자기 밥벌이를 제대로 하며, 지적이고, ....' 등등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아나운서, 기자들을 보며 아 30대는 저런 모습이면 좋겠다, 생각해 왔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동경하던 서른이 되었을 때, 나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바로 그 레퍼런스, 롤모델이 없다는 거였다. 예쁘고 능력있고 닮고 싶은 모습의 여자들 말이다. 회사에서 가질 수 있는 나만의 무기, 결혼할 사람은 어떻게 알아보는 건지, 뭐 그런 것을 물어보고 듣기에 회사 선배들은 일이면 일, 살림과 육아에 다들 지쳐 보였다.


한껏 꾸미기 바쁜 대학생 때 지하철에서 본 직장인들은 왜 저렇게 퀭한 눈을 하고 있으며, 화장이 다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는가, (내가 뭐라고) 그런 직장인들은 왜 자기 자신을 가꾸지 못하는지 못마땅해 했는데, 이제 내가 그 꼴을 하고 지하철에 실려가는구나. 뭐 그런 일기를 쓴 적도 있었다. 출퇴근길 차창에 비친 내 얼굴만 봐도 현실에 목매달린 얼굴을 하고 있는데, 주변에 보이는 다른 여자들이라고 달라 보일 리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회사에는 예쁘게 보일 사람이 없다는 현실을 몰랐다!




사실은, 인정하기 싫었을 뿐 멋지고 잘 가꾼 여자 선배들은 지금도 주변에 많다. 뽀얀 화장을 하고 화사한 정장을 입고 프로의 미소를 짓는 뉴스와 드라마 속 커리어우먼이 아닐 뿐이다. 사회적 이상, 아니면 티비 속 미의 기준과 다를 뿐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 일과 가정에 충실하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하루를 보낸다. 잘 가꾸고 예쁘고, 일도 엄청 잘 해서 회사에서 인정받고, 자기의 명확한 취미와 취향도 있는 이상적인 어떤 여자를 상상하면서, 옆자리에서 같이 밥벌이하고 있는 선배들도 누군가에게는 예쁜 여자이기도 하고, 중요한 직책에 있기도 하며, 나름의 취향이 다는걸 외면한 거다. 구체적인 삶의 모양이 조금씩 다를 뿐, 주변에서 탄탄하게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 선배들의 이름을 지금도 족히 열 명은 댈 수 있다. 이건 내가 운이 좋아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 별 거 아닌 사실을 깨달은 건 지난 10월, 결혼식이 임박해 오니 휴가를 조금씩 자주 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던지 지금 프로젝트의 PM (이 분도 여자)이 해준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내가 결혼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니, 필요한 휴가는 눈치보지 말고 써요, 결혼 아니어도 휴가는 자유롭게 써야 하는 거고."

PM이 기혼이라서 저런 배려가 가능하단 얘기를 하려는 건 당연히 아니다.


나는 롤모델이라는 걸 멀리서 찾고 있었다. Y선배의 시원시원한 업무분장과 화내는 듯한 말투, L선배의 항상 친절한 태도에 따라다니는 건망증, B의 오래 입었지만 퀄리티가 좋은 트위드 코트. 그런 것들 중에 내가 닮고 싶은 것과 배워야 할 것들을 조금씩 떼어내서 받아들이면, 굳이 '내가 동경한 30대 커리어우먼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라며 현실에 존재하기 힘든 이상형을 그려 놓고 그 이상형과 대결 구도를 펼칠 필요가 없다. 선배들은 회사에서 느끼는 경쟁심과 박탈감을 어떻게 해소하면 좋은지, 아이를 가지려면 어떤 준비가 되면 좋은지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해 주지는 않지만, 먼저 겪어 본 사람들이니 내가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다면 엄청나게 좋은 레퍼런스가 될 수 있다. 혹여나 운이 좋아서 '이상형'을 만나게 될 지언정 같은 업계, 같은 업무 환경에서 라이브로 진행되는 이들의 하루하루보다 더 좋은 참고 자료가 되기는 어려울 거다.


좀 더 발전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롤모델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할 필요도 없을 테다. 그저 내가 80년대생의 사고 방식에 머물러 있는 탓일 지도 모른다. '어쨌든 애는 여자가 낳잖아? 남자 육아휴직이 실제로 가능?' 뭐 이런 거. 30대의 관문을 지나쳤으니 40대에 접어 든 내 모습도 점점 자주 상상하게 되겠지만, 그 때는 이상형을 멀리서 찾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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