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회사 정글 생존기
먹을 것 없는 이야기
2020년, 부서 이동을 했다.
부서 이동하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한 이벤트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내게는 장장 만 9년 만의 일이었다.
그 이유는 맡은 일, 또는 하기로 한 일을 중도에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가는 걸 죄악시한 우리 집 분위기, 또는 성장배경도 있었고, 그리고 회사 분위기도 있었다. 대형 시스템을 운영하는 일은, 그럴 듯한 경력은 안 되면서 그만두고 나가겠다고 하면 역적 취급한다. 니가 나가면 여길 누가 메꾸라는 말이야. 그렇지만 누구라도 어떻게든 빈 자리는 메꿀 수 있다. 내가 봤다.
여의도와 상암동을 매일같이 오가던 어느 시기에 걸려 온 전화는 내게 그렇게 오랜 고민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앗싸,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아, 아니다.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이던가. 아무튼 9년만에 드디어 내게도 부서 이동의 기회가 왔고 난 그걸 덥석 집었다.
안 아쉬운 건 아니었다. 고되고 눈치 보이던 사원 시절을 지나서, 이제는 말년 대리가 되어 고객사 부장 아저씨들과 농담을 나눌 수 있었고, IT인력과 현업 인력이 함께 하는 회의에서 "원하시는 요구사항은 이런 이유로 이번 달엔 어렵다"며 큰소리 칠 만한 경력이 있었다. 고과도 꽤 괜찮았고, 사내 시험 성적도 대리급에서는 받을 수 없는 성적, 스스로 말하기엔 웃기지만, 나름 좀 고오급 인력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 일을 조절하는 위치가 되니 정시 퇴근이 당연했다.
그렇지만 너무 지겨웠다. 다가올 미래도 두려웠다. 나는 길거리 뻥튀기보다 더 부풀려져 있는 것 같은데, 남들은 내가 에이스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건 본사 생활을 꿈꾼 것 반, 도망친 것 반이었다. 내 캐파는 뻥튀긴데, 매출 더 벌어오라고 쪼임당하면서 살껀가, 싶었다. 아 진짜, 앵벌이도 아니고. 회사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인재가 되고자 새로운 길을 가보려 합니다. 라는 꿈 같은 건 없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던가. 첫 한 달 쯤은 그냥 놀았던 것 같다. 문제는 다음 달부터 발생했다. 나는 엑셀을 할 줄 몰랐다. 지난 9년 동안 하던 일은 엑셀을 잘할 이유가 없었다. 엑셀로 수식을 만들고 있느니, 데이터베이스에서 쿼리를 만들어 뽑는 게 훨씬 빨랐고 똑똑하게 느껴졌다. "엑셀 마우스로 하면 집에 못 간다." 라는 상사의 핀잔 섞인 농담을 들으니 구닥다리 PL/SQL Developer가 그리웠다. 그래서 안 지우고 놔뒀다. 너넨 엑셀을 졸라 잘 하겠지만, 나도 내가 졸라 잘 하는 툴이 있어 이 사람들아. 뭐 그런 자존심 때문에. 뭘 어쩌라는 건지, 무슨 결론을 도출해 내라는 건지 알지 못할 숫자와의 씨름이 이 곳의 할 일이었다. 월초가 되면 특히 심했다. 새벽 퇴근이 이어질 때도 많았고 쓰러지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키 190에 육박하는 30대 장정들이 격무로 휘청휘청한다. 잘못 왔다. 아무리 하기 싫고 드러웠어도 퇴근 시간만큼은 내가 정할 수 있었는데.
또 다른 게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서로에게 너무나 잘해 줬다. 나에게 보내는 환대도 물론 그렇지만, 영혼이 저 사람 마음 속 골방에 있기는 한 걸까 싶게 느껴지는 칭찬과 예의와 아부의 현장을 쉽게 마주쳤다. 서로 밥도 잘 사주고 생일에는 케익도 해 주고 선물도 해 줬다. 와, 이런 건 자기 일만 미친 듯 하던 예전 조직과는 너무 다르다. 어찌 생각하면 이런 환대라도 없었으면 진작 예전 팀으로 다시 도망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회사만 그런 지 모르겠지만, 제조업으로 치면 처음부터 스탭으로 입사하여 끝까지 스탭으로 남는 사람보다 아마 소위 생산 또는 영업조직에서 일하다가 지원 조직으로 흘러오게 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만큼 본사로 오게 되면 역할 변동이 잦고 조직 이동도 잦다. K과장은 올해가 특히 그런 것 같다, 라고 했지만 난 그 말 안 믿는다. 회사 사람 말을 믿는 건 사원 때나 하던 거다. 연말이 되었다. 나를 지원 조직으로 끌어 온 팀장도, "우리 팀으로 오실래요?" 라며 첫 연락을 준 대리도, 엑셀 마우스로 하면 집에 못 간다던 상사도, 내년엔 다른 일을 하게 되었다. 마치 경력 사원이 된 것마냥 적응하느라 애썼는데, 나름 심리적으로 의지 했던 사람들이 또 사라진다.
예전 조직에서 오래간만에 연락 온 J과장은, 자신도 내년에는 부서 이동을 하게 될 것 같다며, 내게 본사 생활은 좀 어떠냐고 묻는다. 이래저래 업무 성격도 너무 다르고, 장단점이 각각 있어서, 어디가 훨씬 좋아요, 라고 할 수는 없다고 나름대로는 솔직하게 느낀 점을 내뱉었지만, 외롭다 또는 불안하다는 표현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아, 외롭다.
나는 크리스마스 즈음이 생일이다. 생일 선물을 자랑 또는 인증하는 걸 핑계 삼아 연말 인사를 보낸다. 팀원들이 갹출해서 보낸 선물비로 내가 뭘 샀는지 그들은 진짜 그게 마음 속 깊이 궁금하진 않았을 거다. - 선물비 갹출도, 팀 단톡방도 내겐 사실 문화 충격이었다. 이런 거 라떼 사원시절까지나 하던 거 아님? 이라고 생각 - 그래도 진짜 나는 카톡 메시지처럼, 팀원들이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나에게 진심으로 잘해 줬건, 그냥 그나마 충원된 인력이 다시 도망가면 안 되니까 잘해 줬건 간에, 개개인은 올해의 나처럼 각자의 이유로 '회사'라는 이름의 정글에서 외롭게 살아남은 인간들일 테니 말이다.
아, 내년에는 또 얼마나 외로울까. 그래도 내가 잘 하는 걸 하면 된다. 또 다시 장님 3년,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뭐 그러면서 주어진 일을 하는 거, 그런 게 내가 잘 하는 거다. 리더가 되고 싶은 꿈도 야망도 없으니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숫자 지옥에서 영영 퇴근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나는 숫자를 싫어하는데 숫자는 나한테 계속 들러붙는다. 이거 어떻게 떼어내지. 다음 목표는 숫자 없는 조직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