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 밖은 여전히 전쟁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번복되는 우울감을 겪고 나서 나는 더 고립되었다. 정신과나 심리상담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웬만해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치료나 상담을 받기를 권하는 편이기도 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문제의 원인이 언제나 ‘나 자신’으로 수렴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을 때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지는 건 본능에 가깝다. 마음이 아플 때는 자신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더 어렵다. 상담실에서 들은 설명들은 틀리지 않았다. 가족 관계, 성격, 과거의 경험들 모두 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었다. 다만 그 설명들이 이어질수록, 나는 점점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고쳐야 할 대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나를 돕기 위한 시도였다는 걸 알면서도 그 과정이 유쾌할 수는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 문제가 전부 내 탓일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치료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설명의 부족에 대한 이야기다. 설명의 화살이 ‘내 안’으로만 향할 때, 나는 오히려 더 고립되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런 질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이유가 정말 나와 가족의 문제만일까. 쉬고 있어도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상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괜히 뒤처지고 있다는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늘 조급해지는 이 감정은, 개인의 성격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겪고 있었다.
사회 탓을 조금 허락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모든 책임을 나에게서 떼어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나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좌표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을 뿐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주어졌던 속도와 기준, 불안정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기 시작했을 때, 나를 향한 질문의 각도는 조금 달라졌다.
고통은 언제나 복합적인 문제다. 고통의 이유에 대해 간명하고 단순한 답을 듣고 싶어지는 건, 우리의 하루가 이미 너무 복잡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울로 인해 일상생활이 어려워지는 순간에는 조정이 필요하다. 스스로 설명되지 않는 고통의 원인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말해줘야 한다. “다 네 잘못은 아니다”라는 문장이 필요한 순간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나는 상담과 치료의 언어가, 의도와 달리 자기 이해를 자기 비난으로 쉽게 뒤틀어버릴 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는 이미 핸드폰을 잡는 순간 수많은 광고와 메시지에 둘러싸이는 공간에 살고 있다. 무엇을 이루어야 하고, 무엇을 가져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요구가 쉼 없이 밀려온다. 우리는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계속 선택해야 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 욕망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님을 알아도, 단칼에 잘라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의지가 약하다거나 자아가 흔들린 사람이라고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 대책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말해 그건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나의 경우에는 다소 고지식한 방식이었지만, 사회과학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공부나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왜 지금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내 문제를 전부 나에게서만 찾지 않게 되었을 때, 고립감은 조금 옅어졌다.
언젠가부터 나는 내 우울이 누울 자리를 찾는 일보다, 생각을 흩뜨리고 밖으로 끄집어내는 쪽에서 풀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을 마주할 때도 나는 가끔 거친 말을 섞어 환기를 시도하곤 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체된 공기를 뚫고 숨을 쉬게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상담실 밖은 여전히 전쟁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해하려 애쓰고, 설명을 붙이고, 끝없이 사고를 굴리는 동안 내 몸은 점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거창한 인생의 의미를 논하고 있었지만, 현실의 나는 침대 밖을 나가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였다. 그 괴리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아픈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못 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정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