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의 봄에 등 떠밀리지 않기
3월이 온 줄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훌쩍 3월도 절반이 지나가고 말았다. 기온은 분명 올랐는데, 매번 예상치 못한 옷차림 때문에 나는 으슬으슬한 추위와 삐질거리는 땀 사이를 번갈아 겪는 중이다. 운동을 하러 나가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핑계로 2월을 통째로 쉬었더니 오랜만에 나온 풋살장에서 유난히 떨어진 체력을 실감하며 포기를 선언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르거나 또는 작심삼일은커녕 나약한 인간일까 하며 좌절한다. 변덕스러운 날씨만큼 나도 변덕스럽다. 미루고 미루다 2월을 흘려보낸 것을 누굴 탓하겠나.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는다. 기특하게도 가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겨우 풋살장에 간 것, 어느 날엔 런데이를 켜고 30분만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돌아온 것. 대단치 않은 성취에 작은 만족을 채워본다.
작은 성취가 쌓여 커다란 성장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겠는데?’ 하고 가벼운 문턱을 넘는 시도들은 언제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지난 5개월간 10kg를 감량하면서 루틴을 바꾼 일이나 작년 2월에 시작한 운동이 어느덧 1년 넘게(비록 꾸준히 하진 못했지만) 붙잡고 있는 것도 그렇다. 최근 교회 내에서 시작한 양육자 과정도, 호기심만으로 신청했다가 덜컥 인터뷰를 앞두게 된 연애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내게 유익하리라는 기대가 나의 작심을 조금씩 늘려준다. 메달 4개를 딴 이후로 한 번도 신청하지 않았던 마라톤을 4월에 앞두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습도 없이 패기로 뛰어서 3일을 앓아눕던 10년 전과 달리 지금은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기대로. (모두 10km 메달이다.)
어느새 봄. 세상은 새싹이 움트듯 뭐든 시작해 보라고 등을 떠미는 것만 같다. 새로 입학한 유치원의 버스에서 조카가 울먹이는 사진을 보고 웃음이 터진다. 겨우 인생 3주 차가 된 둘째 조카는 색색거리며 분유를 먹는 게 저도 사람이라는 듯 눈알을 굴린다. 나도 뭔가를 시작해야 할 것만 같아서 일을 벌여두긴 했는데, 내 마음의 옷차림은 아직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나 보다. 남들의 시계가 완연한 봄을 가리키는 동안,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임을 깨달았다. 결국 인터뷰를 취소했다. 주변에 추천서를 받고 신청서를 비롯한 서류도 준비된 시점이었지만.
그리고 인터뷰 날 대신 선택한 곳은 장애인 시설 봉사였다. 누군가는 은혜롭다며 치켜세워주고, 누군가는 놓친 기회를 대신 아쉬워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교회를 처음 등록했던 날로부터 정확히 5년이 흐른 이 화이트데이, 3월 들어 가장 많이 웃었다.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일‘에 몰두할 수 있어서 가장 잘 한 선택이라 확신했다. 야채를 썰다가 손톱을 조금 날려먹고 아직도 검지손가락엔 밴드가 싸여있지만 나만의 5주년을 담담히 기념하기엔 충분했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정성껏 쓴 이력서에는 여전히 소식이 없고, 서울의 수많은 집 중 내 몸 하나 뉘일 곳은 없는 것 같아 한숨이 나오던 날들. 희망보단 절망을 택하기 쉽고 극복보다는 버티는 것만 겨우 해내는 시간들이다. 그걸 ‘방황’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버리기에는 너무 길고 한심해서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남들에게는 피상적인 근황만 주고받을 뿐이다.
하지만 깊은 속내는 어딘가에 해소되어야 한다. 나는 그걸 봉사하는 시간으로 잡념을 잊고 깔깔 웃으면서 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밀어냈다. 글을 쓰는 행위도 그렇다. 가끔은 배설 같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세신’이나 ‘목욕’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에게 내가 이렇게 쓴 글을 공유하는 일이란, 꼭 발가벗고 함께 목욕탕에 가는 일인 것만 같아서 무척 부끄럽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평소의 나는 별 거 있는 사람처럼 다녔지만 실은 별 거 없는 불안을 껴안고 때를 벗기고 살았다’고 고백하는 셈이라서. 기도든 글쓰기든 수다든, 나는 언제나 안전한 관계 안에서 고백하고 싶었다. 해소하지 않으면 정말로 어떤 식으로든 병이 생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전에 마라톤을 할 때, 내 페이스대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선두그룹과 멀어지곤 했다. 조금 쉬다가 그들과 합류하려면 몇 배의 힘을 내야 했다. 차라리 팀워크에 묻어가며 완주하는 게 훨씬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게 꼭 정답일까. 인생을 내 속도대로 가고 싶어서 숨이 턱끝까지 찰 때 잠시 걷겠다는 것이 잘못된 걸까. 낙오된 것처럼 보였던 건 누구의 기준이었을까.
마라톤을 시작하는 총성이 울리면 너나 할 것 없이 응원을 보낸다. 결승선에 도착할 때도 마찬가지로 기록에 상관없이 완주 자체를 환대하는 스포츠는 마라톤이 유일한 것 같다. 나는 그런 무조건적인 응원을 타인에게, 또는 스스로에게 해준 적이 있었던가.
이제는 내가 만나게 될 소중한 사람에게 그리고 나에게 그런 응원을 보내주려 마음먹는다. 풋내기 시절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것, 혹은 뒤처질까 봐 숨 가쁘게 억지로 뛰어가던 마음은 이제 접어두고서. 남들의 봄에 등 떠밀려 가지 않아도 나만의 결승선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법을 오늘도 배워간다. 내 계절은 조금 늦게 도착하더라도 반드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