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집에서 배운 쉼과 시작의 감각
제주도에 왔다.
감귤밭 안에 있는 작은 집에 머물기로 했다.
집 안에서 내다보이는 감귤밭,
감귤밭을 바라보게끔 설계된 통창,
곳곳에 놓인 우드 조각들.
그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 같고,
또 한 폭의 정원 같았다.
그날, 마침 내가 좋이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감귤잎을 톡톡 두드리고,
지붕 위를 가만히 스치며 떨어지는 그 소리.
귓가에 맴도는 그 조용한 리듬은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젖어들었다.
작은 나무 블록으로 만든 그네가 있었고,
테라스 아래에서부터 뿌리를 내린 나무가
두 그루나 우직하게 서 있었다.
그 집은 2층 구조였고,
위층에 올라가면 감귤밭을 내려다보며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을 수도 있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청귤은
방울토마토만큼 작았지만,
단단하게 매달려 영글고 있었다.
“기대된다, 너의 주황이.”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 푸른 단단함 속에 미래를 담았다.
숨을 크게 마신뒤
나무 계단을 올라가 이층에 있는 담요를 들고 일층 바닥에 깔고, 보일러 온도를 높여 바닥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냉장고에 있던 물을 냄비에 담아 데우기 시작했다
물이 끓는 동안,
나는 20분짜리 요가를 했고,
따뜻한 물에 로즈메리 잎을 띄워두고
눈을 감고 5분 동안 명상을 했다.
명상뒤 따뜻한 로즈메리 우러난 물을 마시고,
그리고 통창 너머 감귤밭을 바라보며
그저 숨 쉬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집은 무엇을 하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
요가도, 명상도, 따뜻한 물 한 잔도
자연스럽게 이끌리듯 따라가게 했다.
TV도 없고,
무언가를 하라고 쓰여 있는 문장도 없었지만
공간이 가진 분위기와 조용한 질서가
그 자체로 방향이 되어주었다.
그 집은 쉼이었다.
너무도 꽉 찬 휴식이었다.
나는 퇴실을 준비하며 마지막으로 통창 앞에 앉아 있었다.
정말 나가기 싫었다.
이 집이 내 몸과 마음에 채워준 고요와 충만함이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집을 벗어나 몇 걸음 멀어지자,
방금 그토록 충만했던 감정이
조금씩 낮아지고, 작아졌다.
정말 내가 그 안에서 그렇게 깊은 쉼을 느꼈던 게 맞을까.
안에서 보던 그 풍경과, 밖에서 바라본 집의 모습이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한 걸음씩 멀어질수록
귀에 남은 빗소리는 여전히 선명한데,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부풀었던 감정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집은 안에서 보면 세계였고,
밖에서 보면 작은 나무집 구조였다.
나는 그 차이에서
감정이 얼마나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지를 알았다.
짐을 정리하고 나서자
주인아저씨가 조용히 말했다.
“정류장까지 트럭으로 태워다 줄게요.”
나는 아저씨의 트럭 조수석에 앉았다.
비는 계속 내렸고,
창밖은 축축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집, 정말 멋있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지으신 거예요? 원래 건축을 하셨던 분인가요?”
아저씨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뇨, 처음엔 강아지 집부터 지어봤어요.
뭐 별거 있나요. 개집을 조금 더 크게 만들면 되는 거죠.”
그렇게 첫 번째 집을 만들었고,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두 번째 집, 세 번째 집, 네 번째 집…
하나씩 지어보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했다.
지금은 그 일이 그냥 일상이 되었단다.
그래, 너무 처음부터 큰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시도부터 해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바랐던 그 원함에 닿아 있을 수도 있겠지.
하루를 열심히 사랑한다는 건,
하루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정성껏 해낸다는 것이겠고,
어떤 옛날 아저씨의 ‘드림’은 지금의 이 멋진 집들이겠지만,
그날 그 순간,
아저씨가 할 수 있었던 단 하나는
작은 개집을 짓기로 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 하루의 결심,
그 순간의 최선,
그 손끝의 성실함이
다음 하루, 그리고 또 하루와 이어지며
결국 이렇게 단단한 집을 만들어낸 거겠지.
머리로는 알겠지만 움직이지 않던 내 마음의 손가락들이
오늘은 조금, 아주 조금, 꼼지락거리기 시작한 날이었다.
감사하다.
이 글을 빌려 조용히 전하고 싶다.
“당신의 집에서, 당신의 설계 안에서
저는 온전히 쉬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창,
내게 주어진 감귤밭,
내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공간과 시간에
충분히 머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을.
밖에서 보면 그저 소박한 인생일지라도,
그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감사는
누구보다 깊고 단단할 수 있다는 것.
나는 그 감동이
시간이 지나도 작아지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의 이 통찰이
내 삶의 설계에 오래 남기를 바란다.
감사해, 작은 집 제주야.
너는 오늘 내 마음의 방향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바꿔주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