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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선 Sep 17. 2015

청춘 #2 ​

 - 미세한 떨림의 감각.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비슷한 상황들의 연속.

나에게 무슨 얘기가  듣고 싶었던 것일까?

결론 나지 않는 생각들이 끝을 맺지 못하고 맴돌고 있다.


“ 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우리 그만 집에 가자.”


가깝게 지냈던 선배였지만, 내 기준으로 이렇게 부유한 환경인지는 몰랐다. 서울 강남에서 방 3칸짜리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2년 차 직장인. 부모님께서 도와주셨겠지만, 어쨌든 그때 우리의 월급은 뻔했으며, 모은 돈이 있어도 서울 집값은 만만치가 않다. 난 그때 친척이 소유한 주택 중에 남는 방이 있어서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돈으로 신세를 지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언니는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음달이면 미국으로 떠나는 언니의 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초대된 것이다. 담백하고 싱거운 미역국과 몇 가지 야채 요리 그리고 특별한 장식이나 그림 하나 걸려있지 않은 화이트톤의 심플한 집은 언니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던 걸까? 하루종일  8시간 이상  같은 공간에서 2년 가까이  있었지만, 어쨌든 각자의 프로젝트를 담당했기 때문에 서로를 알만 한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고 해서 더 많이 알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아침식사를 하고 설거지는 내가 했다. 그 사이 언니는 어제 오는 길에 W에서 사온 초록색 염색약 설명서를 보고 있었다.


“집에서 염색하는 것은 처음이야.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응 뭐.. 나도 마찬가지... 그런데 왜 갑자기 염색이 해주고 싶어 졌어요?


“ 떠나기 전에 뭔가 해주고 싶었어.”


선배는 무척이나 섬세하고 꼼꼼하게 염색약을 발라주었다. 내가 내 머리를 해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실에서 머리를 감고 나왔는데 선배가 드라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 정성스러운 선배를 보고 있자니 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머리색은 햇빛이 비출 때마다 잔잔하게 보이는 정도로 자연스럽게 들여졌고, 한동안 사람들에게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것도 기분 좋은 추억이 되었다.


토요일 오후였고 집에 돌아가도 딱히 할 일은 없었지만, 매일 밤 밥을 달라고 집 앞 현관으로 찾아오는 길고양이 세 마리가 떠올랐다. 집에 가야 할 핑계거리를 생각해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배, 주말엔 뭐 할 거예요? 난 집에 일도 있고 이만 가야 할 것 같아요 ”


“응. 전철역까지 데려다 줄게. ”


거리는 한산했고, 10월의 햇살이지만 적당히 따뜻했다.


“외국으로 시집 가는 거 부모님은 많이 서운해 하시지 않아요?”


 “참. 이상했던 게 나는 우리 부모님이 당연히  반대하실 거라고 예상했었거든.

미국이라고 해도 경제적으로 우리 집과는 많이 다르고, 결혼하면 자주 온다고 해도 일 년에 한두 번쯤이나 한국 올 수 있을까? 아무튼, 시집 가서 고생할게 뻔히 보이셨을 텐데 서운할 정도로 흔쾌히 허락하셨어. ”


“ 아.  그래요?... 음..

반대하셨으면 결혼 안 할 수도 있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고 말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선배의 손을 잡았고 그렇게 전철역까지 걸어갔다.


손의 감각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미세한 떨림의 감각.


대학생 때 만났던 첫 남자친구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느낌이 손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감각을, 그 순간을 어느 누구에게 얘기할 수 있을까? 2호선 역삼역이 가까워오자 선배는 내게 조심히 들어가라며 편지 봉투를 하나 건네었다. 집에 가서 읽으라고  얘기했지만, 나는 전철에 앉자마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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