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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정문사서

정문사書 9화《종이날개》

#149

by 온정선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습도가 높은 날이었다.


책방 안에는 은은한 습기와 종이 냄새가 감돌았다.


은수는 개츠비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아 서점문을 닫지 않은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여기 혹시... 어린이 미술 관련 책 있을까요?”


수줍은 말투의 여자 손님은 아홉 살쯤 된 딸이 있고, 요즘엔 말도 줄고 그림만 그리고 있다며

걱정이 된다고 말한다.


『모든 아이들에겐 예술가의 영혼이 있다』


은수는 무심히 말했다.


“부럽네요.”

여자는 멈칫했다. “네?”


“그림요. 계속 그릴 수 있다는 게요.”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그 말은, 은수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것이었다.


여자는 멋쩍게 웃으며 책을 사들고 바쁜 듯이 나갔고, 마침 산책을 마친 개츠비도 들어왔다.

서점은 다시 고요해졌다.


문을 닫고 난 뒤 은수는 문득 창고처럼 쓰고 있는 방의 한 서랍을 열었다.


오래전 미술 도구와 함께 넣어둔 박스 안에서 낡은 서류철을 꺼냈다.


그 안엔 20대 무렵 썼던 메모와 글들, 시도 아닌 글도 아닌 단편적인 문장들이 종이뭉치 맨 위에 한 장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나무 위에서
밑을 본다


그 문장은 낯설지 않았다.


그건 언젠가, 그림을 포기한 자신에게 썼던 시였다.


종이 날개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던 마음으로 손이 아닌 언어를 빌려 처음 만들어낸 조형


그리고 그 날개는 너무 얇고 무거워서 결국 어디로도 날지 못한 채 서랍에 묻혀 있었다.


나는 조형 감각이 없다


그 문장 앞에서 은수는 한참을 멈췄다. 정말 그랬던 걸까?

아니면, 단지 누군가의 반대로,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미술을 내려놨던 것뿐은 아니었을까?


개츠비가 조용히 다가와 종이 위에 앉았다. 은수는 고양이의 앞발을 피해 종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연필을 집어 들고, 시 아래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그래도 나는 계속 만든다
어쩌면

이 글이 내 첫 비행일지 모르니까



그날 밤 은수는 서랍에서 꺼낸 오래된 원고지 위에 처음부터 조심스럽게 문장을 옮겨 적었다.


새로운 제목을 붙이며, 이렇게 적었다.



『종이 날개』


나무 위에서

밑을 본다

뜯어 붙인 이 어깨 위의 날개가
과연 내 무게를 견뎌

저 땅까지 나를 안전히 데려다줄 수 있을까

목이 부러져 죽게 될까
아니면 살 수 있을까

혹은 그냥 이 나무 위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해야 할까


갈등하다 문득 생각한다

... 날개라

조금만 더 보강하면

내 몸을 지탱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럴수록
날개는 점점 무거워지고
마침내 나를 짓누를지도 모른다

밑에는 단단한 땅
위에는 무거운 날개

나는 그 사이에 끼어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나에겐 조형 감각이 없다는 것
그래서 제대로 된 날개를 만들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어쩌겠는가
종이 날개로는
결코 땅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밑을 본다

정말 내려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기억해


진작 알았어야 했다
왜 아무도 내려가지 않는지
왜, 그토록 멋진 날개가 필요했는지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래도 나는 계속 만든다
어쩌면

이 글이 내 첫 비행일지 모르니까




며칠 뒤, 책방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날의 여자 손님이 다시 나타났다.


손에는 얇은 크래프트지 종이를 들고 있었다.


“이거...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여자는 멋쩍은 듯 웃으며 아이가 그렸다는 그림을 펼쳤다.


종이 위엔 커다란 나무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아이


그리고 아이의 어깨에는 크고 하얀 날개가 붙어 있었다.


날개는 어딘가 투박하고 연필 선은 거칠었지만
무언가를 날고 싶어 하는 사람의 날개였다.


은수는 말없이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그림... 어디다 걸어도 될까요?”


여자가 묻자, 은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책방 어딘가에요.

이건, 우리 모두가 본 적 있는 장면이니까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간 뒤, 은수는 그림을 품에 안고 책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햇살이 조금 더 머무는 자리를 찾던 중, 책장 위에서 느릿한 기척이 느껴졌다.


고양이 개츠비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을 바라보던 개츠비는 무언가 아는 듯한 눈빛으로 그림을 향해 다가왔다.


“그래, 네가 고른 거라면 괜찮겠지.”


은수는 웃으며 그림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하얀 날개를 단 아이가 앉아 있는 나무 위, 고양이의 시선과 마주하는 곳에.


책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종이 냄새, 햇살, 그리고 고양이의 숨소리만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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