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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정문사서

정문사書 10화 《 열아홉의 여름》

#150 은수의 세번째 문장

by 온정선

고3 여름이었다. 에어컨이 고장 난 독서실은 연신 부채질을 해도 숨이 막혔고, 책상 사이사이로 흐르는 땀 냄새는 집중력을 흩트려놨다.


그날은 유난히 집중이 되지 않아 지쳤던 날이었다. 수학 문제 하나를 붙들고 한 시간을 넘게 허비한 끝에, 결국 나는 머리를 식힐 겸 복도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때, 그들이 다가왔다.


한 명은 키가 크고, 머리는 늘 묶은 채였다. 얼굴은 하얗고 눈빛은 청량했다. 무엇보다 손재주가 좋아 쉬는 시간마다 낙서를 하곤 했는데, 그건 낙서라기보단 작은 만화 같았다.


다른 한 명은 눈빛예쁘게 반짝거렸다. 단정한 얼굴에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종종 선생님들조차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곤 했다.


둘은 자매처럼 닮아 있었다. 눈이 크고 맑았고, 함께 웃을 때면 마치 같은 쌍둥이자매처럼 느껴졌다


그날, 그 둘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네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싶어."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듣고 싶지 않았던 내밀한 고백.


농담이 아니었다. 그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말보다 더 많은 걸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작게 다물다가 겨우 말했다.


"1년 후에 다시 나한테 와.
그때도 서로의 사랑을 맹세할 수 있다면, 그땐 너희 이야기를 들어줄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말을 뱉고 나서야, 그 말이 마치 누군가 내 안에 들어와 대신해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 둘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짧고 단정한, 약간은 허탈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 뒤로 우리는 종종 마주쳤다.


하지만 그날의 대화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친했고, 나는 여전히 무심한 척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수능 시험은 끝났고, 대학에 들어가고, 세상은 조금은 바뀌었다.


그들의 소식은 굳이 찾지 않아도 들려왔다.


한 명은 미대에 진학했다. 그 친구가 그린 포스터가 교내 공모전에서 대상을 탔다는 얘기도 들었다. 다른 한 명은 전교 1등답게 S대학교 의대로 진학했다.


나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던 듯, 그들이 찾아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주길.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우연히 광화문 교보문구에서 그들을 닮은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그림을 잘 그리던 그 친구였다. 긴 생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채, 진열된 미술서적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나는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대신, 그날의 말을 떠올렸다.


"나중에 우리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릴 거야.
그리고 그 만화 제목은 '가십'이라고 할 거야."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녀는 그 만화를 그렸을까.

그림을 여전히 그리고 있을까.


'가십'이라는

이름으로 열아홉의 여름을

그 약속을

누군가를 사랑했던 진심을



어쩌면, 그 만화는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책상 위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때, 서로를 얼마나 믿었는지 아무도 모른 채로.







은수는 이 글을 책방 한구석 작은 탁자에서 썼다
어떤 기억은 오래 묵혀야 글이 되기도 하니까

그 여름의 이야기를 아직 완전히 잊지 못했으므로
글의 제목을 ‘열아홉의 여름’이라 적어둔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목격했던 순간이었으니까

-은수, 정문사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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