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감각과 기억
누군가 떠나면, 누군가가 온다.
한 사람이 마음을 쏟고 에너지를 쓸 수 있는 관계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겠지.
누군가는 나에게 왔다가 계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나는 스쳐 지나가는 계절의 아쉬움만을 붙잡고 있었다. 짧은 순간도 나름의 의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애써 부정했다.
이제는 안다.
관계라는 건 붙잡는다고 억지로 붙들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어떤 인연은 떠나기 위해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어떤 만남은, 잠시 머물다 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떠난 사람도, 남겨진 사람도, 잊혀 가는 기억도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내가 너를 밀어냈을까?
너가 나의 이름을 처음 불렀을 여름날을 기억한다.
습하고, 무더웠던, 아무 의욕이 없던 7월의 어느 날.
학교 도서관. 세로 창이 길게 나있던 벽 구석에 앉아있던 그날의 너를.
그날 나는 너를 처음 알게 되었다.
하얀 얼굴, 투명하게 빛나는 큰 눈을 가진 네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무해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담백하고, 솔직하게 말을 건넸다.
꽤 오랫동안 나를 알고 있었고, 지켜봤고,
언제가 우연히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우리 과에 이런 아이가 있었나?'
너의 존재를 알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것이
왠지 미안해졌다.
그날로 우리는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언젠가는 멀어질 거 같다는 느낌이 한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인연이 아닌 것을 알면서로, 애써 끼워 맞추려고 노력하는 연인처럼...
조금은 애틋하게, 조금은 설레기도 했던, 진지하기엔 가벼운
그 해 여름날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가을이 오고, 함께 영화를 본 어느 밤
조금은 헤어지기 아쉽기도 했던 공기를 품고 산책하며 집으로 돌아오던 날,
너는,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너를 갖고 싶어.
안고 싶어."
참 이상한 말이었다.
우린 그냥... 친한 친구잖아.
하지만 알 수 없는 너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나는 네가 원하는 것들을 해주고 싶었다.
그게 나의 우정이었을까? 아니면 연민이었을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는 것을.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을까?
우정이라는 이름아래
달콤한 키스와 애틋한 포옹이
너에겐 선물이 될 수 있었을까?
네가 원한다면 그런 것쯤은 그냥 내 마음과 상관없이 해줄 수 있다는 착각.
그건 결국, 나의 오만이었다.
아무런 의미 없는 키스는
거절보다 더 큰, 실질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땐 알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의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