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나면 잊어버리는 도시

#3

by 온정선

그 꿈에서 깨어났다. 아침이었다. 천장은 평소와 같은 흰색이었고, 창문 틈으로는 익숙한 햇빛이 들어왔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불도 하나뿐이었다.


그날 이후 은수는 평범한 일상을 다시 살았다. 회사에 가고, 커피를 마시고, 퇴근길에 지하철을 탔다. 모든 것이 이전과 같았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씩 문득 이상한 기억이 떠올랐다.


대문 옆에 붙어 있던 이상한 기계.

전화기.

그리고 바닷소리.


웅- 보일러가 끓는 것 같은 그 소리.


은수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건 그냥 꿈이었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꿈의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았다.


보통 꿈을 꾸면 깨자마자 사라지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오히려 조금씩 더 또렷해지는 꿈.


특히 그 이름.


민초희.


다음에 만약 다시 꿈을 꾸게 된다면, 그땐 만날 수 있을까?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은수는 다시 그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그 집 앞이 아니라 낯 선 골목이었다.


좁고 길게 이어진 골목 그리고 그 끝엔 회색 노출 콘크리트 3층 건물에 검은 철문이 인상적인 건축 사무소 같은 건물이 있었다.


마침 그 대문에서 검은 뿔테에 바바리코트가 멋지게 잘 어울리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 혹시 여긴 건축 사무소인가요?"


은수가 물었다.


의지와 상관없는 자연스러운 질문이 나오자 이건 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단호하면서도 귀찮은 듯 " 아니."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골목 끝으로 걸어가 사라졌다.


은수는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건축 사무소처럼 보였다.


현대식 노출 콘크리트 벽. 검은 철문. 그리고 문 옆에는 작은 금속 명판이 붙어 있었다.


천천히 대문 앞 가까이로 걸어갔다.


명판에는 [CHOI ARCHIVE]라고 적혀 있었다.


기록보관소? 은수는 잠깐 눈을 깜빡이고 다시 봤다.


[CHOI ARCHITECTURE]


초이 건축? 이번에는 글자가 조금 달라 보였다.


" 뭐야.. "


그 순간 은수의 심장이 조금 빨리 뛰기 시작했다.


" 초이.... 민초희?"


은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골목 끝에서 아주 희미하게 바닷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웅- 그것은 보일러 소리같기도 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집과 오래된 나무 대문이 보였다.


은수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집에는 창호지 미닫이 문들이 4개 정도가 보였고, 마당엔 오랜 수돗가와 대청마루가 있었다.


무엇을 찾으려는 듯 첫 번째 창호문을 밀었다. 사람 한 명 눕기에도 모자란듯한 공간이었다.


"여긴 아니야."


그 옆문 그리고 또 다른 문을 빠른 속도로 열어봤지만 아무것도 어떤 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급하게 오른쪽 끝 모서리를 돌아 첫 번째 문을 열었다.


순간 낯선 듯 익숙한 키가 작고 얼굴이 하얀 여자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어질러진 방 안에서 널브러져 뒹굴 거리고 있었다.


은수가 방안에 들어서자 그 여자는 " 드디어 왔구나!"라고 몸을 일으켰다.


" 혹시 네가 민초희야?"


"나는 아니야."


키가 작은 여자 고개를 숙인 채 은수를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녀는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방 안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처럼 보였다.


마침 멀리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당 어딘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은수가 여자에게 다시 물었다.


" 그럼 너는 누구지? 이곳은 어디야?"


여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 나를 따라와. 데려다줄게."


" 어디를? "


그때 전화는 다급한 듯 울리고 있었고, 은수는 몸을 돌려 마당으로 돌아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그리고 그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은수야.”


은수의 심장이 순간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목소리. 친구 진형이었다.


“기억해. 잠에서 깨면 다 잊어버리니까.

그리고 지금은 7시 20분이야.

너 출근해야지!"


은수는 번쩍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 천장을 바라봤다.


창문 밖은 아침이었고, 휴대폰의 시간은 꿈에서와는 다르게 6시 59분이었다.


고양이 개츠비가 이불 밖으로 나온 은수의 오른발을 핥고 있었다. 마치 일어나길 잘했다는 듯.


잠깐 귀를 기울이자 어디에선가 웅-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아주 멀리 있는 바다의 파도처럼 느껴졌다.


꿈에서 만난 그 여자를 생각한다. 집 안에서도 신발을 신고 있던 그 여자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던 것일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은수는 곧바로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치고, 다시 일상을 시작했다.


회사 1층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순간 문득 생각이 스쳤다.


꿈에서 만났던 여자

얼굴이 하얗고 작고 예뻤던 그 여자.


어디서 본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몇 년 전 회사에서 갑자기 퇴사한 뒤

연락처를 모두 지우고 사라져 버린 옛 직장 동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연.


지연이 회사를 그만둔 일은 꽤 충격적이었다. 그 주에 영화 '오펜하이머'가 재밌었다며 다시 보자고 했고, 며칠 뒤에는 제주도 여행도 가자고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는 날 갑자기 사라졌다.


연락도, 이유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은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꿈속 세계가 어딘가에 정말 존재한다면 지연은 그곳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기로 한 건 아닐까 하는


다음에 다시 그 꿈을 꾸게 된다면


그때는 민초희를 만날 수 있을까?

지연을 만날 수 있을까?


어디선가 바닷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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