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를 좋아하세요?”
이 질문을 해보거나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종이를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알고 싶었던 적이 없다. 기억 속의 종이를 떠올려보자. 어린 시절 내가 접했던 종이는 흔히 ‘똥종이’라고 불리는 학교 가정통신문에나 쓰이던 갱지와 뭐가 뭔지 매번 헷갈리는 도화지와 마분지, 그리고 상상 속의 종이나 다름없는 속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의 백지장 정도. 똥종이를 만들 때 실제로 똥이 들어가는지, 말똥이 얼마나 단단하길래 마분지가 그렇게 두꺼운지 궁금했고, 맞들면 낫다고 하는 백지장의 크기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싶었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그 궁금증을 풀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 글을 써 내려 가면서 다시 궁금해진 것으로 보아 완전히 까먹은 게 틀림없다.
사물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하는 성인이 된 이후엔 뭐가 좀 바뀌었을까? 꼭 그렇지도 않더라. 8절지와 4절지로 구분하던 종이를 A4나 B4용지로 바꿔 쓰기 시작한 것 말고는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대신, 종이와 가까워지긴 했다. 책을 읽기 시작한 거다. 책을 통해 더 다양한 종이를 접했고, 이제는 좋아하는 냄새 중 하나로 종이 냄새를 꼽는 너스레를 피우곤 한다. 그러나 그것도 단지 그 뿐이지 종이를 특별히 여겨 생긴 소산 따위는 아니었다. 그랬던 나는 ‘종이’잡지를 만드는 영역에 발을 들였다. 이 시점에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라는말이 나올 법도 한데, 안타깝게도 그런 드라마는 없다. 종이에 이렇다 할 감흥이 없던 잡지 에디터에게 종이란 겨울 동안 집 앞에 쌓이는 눈과도 같았다. 쌓인 눈을 계속해서 치워내듯 흰 종이에 원고를 채워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와 종이는 애증이랄 것도 없는 텁텁한 관계를 맺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 이번 호를 기획하면서 흥미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그 기회는 둘 사이의 관계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할만 한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였다.
한솔제지와 함께 종이에 관한 다양한 시선을 다루는 칼럼을 맡게 됐다. 앞서말한 바를 되짚어봤을 때, 내가 이 칼럼을 맡아도 되나 싶은 멋쩍은 기분이 든 건 사실이다. 책을 만들고 잡지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정작 종이에 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가진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내가 맡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종이잡지를 만드는 이상 내겐 시야를 넓힐 만한 어떤 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제지 공장에 갔다. 그동안 종이가 어떻게 세상에 나오는지는 ‘종이는 나무로 만든다’라는 극도로 단순화한 과정으로만 인지하고 있었지, 실제로 어떤 공정을 통해 종이가 만들어지는지는 몰랐기에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알아 나가기로 했다. 장항과 대전, 신탄진, 천안까지 한솔제지의 국내 공장 네 곳 모두를 방문했다. 공장의 규모와 각 공장이 생산하는 종이의 종류는 다르지만, 종이를 제작하는 전반적인 과정은 비슷했다.
지식으로 이어질 만한 정보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첫째, 종이는 나무를 잘게 분쇄하고 추출한 펄프를 화학 약품과 함께 물에 풀고 건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데, 그후 코팅하거나 광택을 입히는 공정, 색염료를 넣는 공정 등에 따라 종이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점. 둘째로, 종이는 인쇄용지만이 아닌 과자나 의약품의 포장재로 사용되는 산업용지, 우편물의주소표기나 바코드를 부착하는 데 쓰이는 라벨용지와 유리 사이에 들어가는 유리 간지 등의 특수지,복권이나 영수증 용지로 많이 알고 있는 감열지까지도 모두 종이의 종류에 속한다는 점. 마지막으로,이모든 과정은 기계를 통해 자동으로 이루어지고, 사람은그 기계를 관리하거나 품질 체크, 출고 등의 사후 업무를 담당해 사람과 기계가 조화를 이루어야 종이가 완성된다는 점 정도다. 편집부에게 공장의 풍경은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취재를 갔던 때는 늦은 겨울이었지만, 공장에서는 반소매 티를 입은 직원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스팀을 이용해 종이를 건조하게 하므로 공장 내부는 아무래도 습하고 더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겨울 끝자락에 무더운 여름이 바싹 붙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가지 더 기억에 남았던 건, 공장 근처 이곳저곳에 매력적인 장소가 꽤 많았다는 점이다. 널찍한 도로가 있는 공장의 너른 부지는 일본의 조용한 동네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큼직한 종이와 건물, 트레일러들을 보면 마치 거인국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제지공장이 공정에서 사용한 물을 방류하기 위해 강이나 바닷가 근처에 위치해야 하는 것 역시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공장을 다녀와서는 일상에 종이가 맞닿아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종이를 홍보하고 판매하는 한솔제지의 마케팅팀과 영업팀 구성원들, 그리고 창작 활동에 있어서 종이를 사용하는 창작자들을 인터뷰했다. 그들에게 종이의 가치와 미래를 물었고, 질문을 들었을 때 그들의 눈빛은 사뭇 열띠었다. 아니 그 모습은 오히려 순수해 보였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듯 조심스러우면서도 힘 있는 말씨에서 종이를 대하는 각자의 소신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종이는 ‘물성’으로서의 존재를 넘어 사람과 사람, 과거와 현재를 잇는 ‘소통’수단이었다. 마치 말을 전하는 소리처럼 말이다.
정확한 척도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이번 칼럼을 준비하면서 접했던 모든 경험이 나 자신에게도 직업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종이에 글과 사진이란 옷을 멋스럽게 입히는 업에 종사하면서 종이에 관한 칼럼을 맡는다는 것 자체로도 소중한 기회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현시점에서 누군가 내게 종이를 좋아하냐고 다시 묻는다 해도 선뜻 좋아한다고는 말하지는 못할 듯 하다. 나보다 먼저 종이를 소중히 여겨 온 사람이 많으니, 나는 그저 최근 들어 종이에 조금 관심이 생긴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