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
어릴 때 형은 형이니까 나보다 뭐든 다 잘했는데, 그림도 잘 그렸었다. 만화 캐릭터 같은 것들, 귀엽게 오밀조밀 잘 그렸다. 이제야 알았지만, 형은 그때 만화가가 되고 싶었단다. 공책에도 그리고 지우개에도 그렸던가, 집 곳곳의 벽에도 그리곤 했는데 나도 괜히 따라 하고 싶었다. 잘 보면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근데 도저히 못 따라갔다. 당시에는 좀 분하긴 했는데 몇 년 뒤에 까닭수로 ‘왼손잡이는 원체 악필이면서 동그라미도 제대로 못 그리니 대체로 그림을 못 그린다’는 말을 어디서 보고 지금까지 변명하며 살고 있다.
언제는 형이 집 대문 옆에 매직으로 남자애 하나를 그려놨다. 만화책 ‘힙합’에서 본 캐릭터 같았는데 삐죽거리는 앞머리에 벨트가 길었던 거로 기억한다. 얌생이 같은 게 형 닮았던 것도 같다. 퍽 잘 그려놔서 대문을 들락거릴 때 신경 쓰였고, 점점 나도 뭐 하나 남기고 싶어졌다. 견줄만한 그림 하나 나올 것 같은 기대감도 들었지만 난 그림을 못 그린다는 열등감이 더 컸던 관계로 집 어딘가에 그릴 용기는 들지 않았다. 못 그려놓으면 형이 놀릴 게 뻔하니… 그래서 옆집 대문 옆의 벽에 그렸다. 정말 개떡같이 그렸는데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형은 그걸 어떻게 보고는 엄마한테도 말했었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엄청 웃었을 거고, 난 얼굴이 빨개졌을 게야. 옆집 할머니한테 안 혼난 것도 신기하다. 다음에 부산 내려가면 그 벽화 아직 잘 있는지 보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