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녹 한 컵에 담긴 마음의 거리
캐나다에서 온 에밀리는 고요한 눈빛에 목소리도 모나지 않은, 참 따스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숙소에서 학원까지 늘 걸어오곤 했다. 버스로는 세 정거장은 족히 되는 거리였다. 칼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에도 우리보다 훨씬 얇은 옷차림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던 모습이 걱정되어 버스 노선을 알려주었지만, 에밀리는 이미 알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 정도 거리는 그저
‘워킹 디스턴스(walking distance)’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에서 온 그녀에게는 그럴 법도 했다. 언젠가 미국 서부를 여행하며 다음 목적지까지의 이동 시간이 오래 걸려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그때 현지 가이드는 “다섯 시간쯤이면 바로 옆집(next door)이나 다름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웃어넘겼지만, 좁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온 내 안의 심리적·물리적 거리감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새삼 돌아보게 된 순간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에밀리는 우리를 위해 특별한 음료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그녀는 바나나우유 색의 차가운 음료를 배낭 가득 무겁게 짊어지고, 또 그 길을 걸어왔다. 온몸에 찬바람을 머금은 채 강의실로 들어선 그녀의 얼굴에는 잔뜩 기대를 품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녀가 소개한 것은 캐나다의 전통 크리스마스 음료, ‘에그녹(Eggnog)’이었다.
에밀리는 미리 준비해 온 종이컵에 음료를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네며, 지그시 눈을 맞추고 우리의 반응을 살폈다. 우유와 달걀이 섞인 듯 달콤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차갑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을 채웠다. 휘핑기 하나 없이 오직 손으로 그 많은 양의 에그녹을 저어 만들었다는 말을 들으며, 그 정성과 시간이 고스란히 이 한 컵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walking distance
에밀리를 만나고 난 뒤, 내 마음속에서 이 말은 조금 다른 의미로 남았다. 버스로 몇 정거장쯤 되는 거리, 찬바람을 맞으며 그녀가 걸어왔을 시간, 수백 번 달걀을 휘젓는 수고로움, 흔들리던 배낭의 무게. 그 모든 것이 겹쳐져, 나에게는 '워킹 디스턴스'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닿고 싶어 하는 따뜻한 마음의 거리로 읽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