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가 시트콤이 되던 순간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by 버티기





살다 보면 뇌가 나를 배신하는 순간이 있다. 이십 년 넘게 함께 산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안다고 자부하던 나의 이성이, '불안'이라는 파도 한 번에 통째로 삼켜진 그날 저녁처럼 말이다.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 냄새가 온 집안을 채우고 있었지만, 돌아올 시간이 삼십 분이나 지난 남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평소 칼같이 시간을 지키던 사람이라 불안은 더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아파트 정문을 지나 큰길까지 나가 집 쪽으로 향하는 차들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그의 차와 비슷한 색의 차가 지날 때마다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지만, 끝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런 적이 없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왜 전화를 안 받는 걸까, 아니 못 받는 걸까.'


불안은 빠르게 몸을 잠식했다. 집으로 돌아와 차 키를 챙겨 그의 직장으로 향했다. 텅 빈 주차장, 불 꺼진 사무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의 차. 그렇다면 이미 출발했을 텐데, 집으로 오는 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없었다. 심장 박동은 가슴을 넘어 고막까지 울렸고, 목은 바짝 타들어갔다. 112를 누르는 손가락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112 맞죠? 제 남편이 돌아오질 않아요. 이십 년 넘게 살았는데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어요."


"선생님, 걱정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성인 남자의 경우 24시간이 지나야 실종 신고가 가능한 부분이라서요..."


"제가 집 근처도 다 돌아다녀 봤고, 직장까지 가봤는데 차도 없고 전화도 안 돼요! 혹시 어디 쓰러져 있다면 빨리 찾아야 하잖아요!"


내 절박함이 전해졌는지, 잠시 후 지구대에서 나이 지긋하고 진중한 경찰관 두 분이 집으로 오셨다. 그때부터 거실은 본격적인 수사 현장이 됐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어갔다.


“채무 관계는 없습니까?”


“누군가 원한을 살 만한 일은요?”


'원한'이니 '채무'니 하는 단어들이 튀어나오자, 입안이 빠짝 말랐다. 침조차 삼켜지지 않았다. 빨리 찾아야 하는데, 그래야 생명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을 텐데. 내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잔인한 범죄 스릴러가 상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동료 번호 아는 거 없으세요? 친구분 연락처라도.”


이십 년을 함께 살았는데, 아는 번호가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모르는 사이였나 싶은 자괴감이 스칠 즈음, 경찰관 한 분이 스치듯 던진 한 마디가 정지된 나의 뇌를 세차게 때렸다.


“혹시 최근에 회,.. 회식...?”


그 순간, 캄캄했던 뇌 회로에 전구가 번쩍 켜졌다. 며칠 전 소파에 누워 웅얼거리던 남편의 목소리. “나 목요일에 회식 있어….” 내 뇌가 ‘스팸 메일’로 분류해 휴지통에 버렸던 그 말이 뒤늦게 복원되었다.


"잠깐만요."


허겁지겁 회식에 함께 있을 법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거기에 그가 있었다. 그는 평온하게, 아주 즐겁게 회식 중이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면목이 없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려 사건을 해결하러 왔던 경찰관들의 표정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허리가 꺾이도록 사과를 거듭했다. 베테랑 경찰관은 나무라기는커녕 “다행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온화한 미소를 남기고 돌아갔다.


촛불보다 작았던 걱정의 불씨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산불이 되었다가, ‘웃픈’ 해프닝으로 끝났다. '불안'이라는 마음의 나비효과였다.


그날 밤,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남편의 등짝을 날릴 기운조차 없었다. 불안도 이쯤 되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가도,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한다. 남편이 실종된 게 아니라, 내 기억력이 잠시 실종됐던 것뿐이니까.


이제 내 휴대폰엔 ‘남편’보다 ‘남편 직장동료’ 번호가 더 선명하게 저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