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후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미디어의 유혹은 소리 없이 스며든다. 사흘 연속 화면을 가득 채운 뽀얀 굴의 향연에 결국 마음이 움직였다. 평소 굴을 탐닉하는 편도 아니면서, 우리 내외는 그 ‘유혹’를 따라 보령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국토의 중심에서 서해로 향하는 길. 휴게소 로컬 장터에 들러 농산물을 구경하며 여행은 모처럼 별 탈 없이 매끄러웠다. 보령 굴단지 표지판이 시야에 들어올 즈음, 남편은 문득 보령의 인구를 물었다. 나는 익숙하게 음성형 AI를 켰다.
하지만 기계가 내뱉은 명확한 숫자 뒤로, 내 생각은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AI는 전날 밤, 내가 주식 차트를 들이밀며 손절가를 묻던 불안의 도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발단은 금요일 오후의 짧은 텍스트였다.
주변의 성공담에 휩쓸려 증권 앱을 뒤적이다가, 30%나 급락한 종목 하나를 발견했다. 작년 초 형부가 권했던 이름이었다. 떨어지는 칼날은 잡는 게 아니라는 격언 따위는 떠올릴 겨를도 없이, 근무 중인 남편에게 톡을 보냈다.
“00 주식 차트 좀 봐줘요.”
잠시 후 숫자 ‘1’이 사라지고 돌아온 답장은 간결했다.
“사보든지….”
나는 그 텍스트에 ‘희망’이라는 필터를 씌웠다. 그것이 내 안목에 대한 신뢰나 긍정인 줄 알고 덥석 매수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퇴근한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필터를 장착하고 있었다.
“안 샀지? 야수의 심장이 아니고서야….”
그제야 남편의 문장 속 ‘말줄임표(…)’가 보였다. 거기엔 ‘나라면 못 사지만 정 사고 싶으면 네 마음대로 해봐’라는 냉소와 거리감의 언어가 장착되어 있었다.
금요일엔 스스로의 무모함을 탓하는 자책이 서운함을 압도했다. 손절 시나리오를 짜느라 미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서운함은 왜 하필 보령의 굴단지 입구에서, 가장 즐거워야 할 찰나에 불쑥 고개를 들었을까.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시니컬하게 답했느냐고. “그거 좀 위험한데 괜찮겠어?”라는 다정한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웠느냐고.
하지만 남편은 정색하며 '타이밍'을 문제 삼았다. 공들여 준비한 주말여행이 나 때문에 망가졌다는 표정이었다.
나에게는 ‘그때’의 서운함이 비로소 ‘지금’에야 입 밖으로 나온 것뿐이었는데, 그의 좌표에서는 그것이 현재의 행복을 파괴하는 공격이었나 보다.
결국 나는 입을 다물었다.
비린내 섞인 바닷바람 속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찜 잘하는 집을 찾아 굴을 까먹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굴은 달았지만, 머쓱해진 내 마음의 좌표는 여전히 갈 곳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우리는 늘 같은 공간에 앉아 같은 음식을 나누지만, 가끔은 서로 다른 감정의 좌표 위에서 단절된 점이 된다.
그 좌표 위의 점들이 점점 가까이 찍히고 언젠가는 만나 하나의 선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또 그렇게 하루라는 좌표 위에 각자의 점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