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기억할게

by 버티기





신축 아파트 거대한 주 출입구 공사가 한창인 길목에서 나는 발길을 멈췄다.


어제까지만 해도 여름에는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갈색 단풍비를 흩뿌리던 커다란 메타세쿼이아가 사라졌다.


짧은 밑동만 남은 나무의 단면 위로 나이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촘촘하고 굴곡진 그 선들은 나무가 온 몸으로 견뎌낸 비바람과 갈증의 기록이자, 수십 년간 쟁여 온 시간의 주름이었다.


세상은 그 장엄한 생애를 '장애물 제거' 혹은 '경제성'이라는 건조한 단어로 단숨에 정리해 버렸다.


수백 년 된 보호수였다면 정성껏 화단을 두르고 이름표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값비싼 정원수였다면 중장비를 동원해 뿌리째 옮겨 심는 수고를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흔하디 흔한 가로수는 효율의 논리 앞에 가차 없이 베어진다.

매끄러운 콘크리트 진입로를 설계하는 계산기 소리가, 나무가 쓰러지며 지르던 마지막 비명보다 더 컸던 모양이다.


그루터기 앞에 서서 문득 우리의 삶을 겹쳐 보았다.


오래 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평범하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베어지는 것들. 누군가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려 애쓰던 시간조차, 거대한 시스템과 자본의 논리 앞에서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소모품'으로 취급될 뿐이다.


세상은 자꾸만 우리의 '쓸모'를 묻는다. 효용이 다하면, 그곳에 오래 서 있었다는 사실조차 쉽게 지워진다.


머지않아 근사하게 완공될 아파트 정문을 드나들 사람 중 누구도, 발밑 콘크리트 아래 한때 뜨거운 생명력을 뿜어내던 거목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잘려 나간 나무가 안쓰러웠던 것은, 그것이 곧 나의 미래처럼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루터기 앞에 멈춰 서서, 쓸모를 다하고 세상에서 밀려나버린 그 존재를 내 기억 속에 옮겨심기로 했다.

잘려 나간 단면을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소모되어 사라진 나무의 삶에 마지막 예우를 갖춘다.


"내가 너를 기억할게.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어쩌면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나 자신의 두려움에게 건넨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 역시 세상의 속도에 밀려날 때, 누군가 나의 나이테를 읽어주며 "여기에 누군가 치열하게 살았었구나"라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서글픈 투사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나이테를 읽어주는 그런 마음들이 있다면, 비정하게 소비되는 우리의 삶이 완전히 허망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붙잡아본다.


오늘 내가 마주한 그루터기로 남겨진 나무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나무는 이제 지상의 쓸모를 뒤로한 채,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베어 지지 않을 뿌리를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