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왜곡

힘든 시간은 그렇게 느리게 흐른다.

by 버티기





눈앞에 절벽이 보였다.


그다음 순간, 바다가 나타났다.


절벽과 바다가 시야를 오가며

차는 빙글빙글 돌았다.


차가 이리저리 부딪히고

내 머리는 쿵 하고 창문에 부딪힌 뒤

조수석 쪽으로 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순간,

시간은 멈춘 듯 느리게 흘렀다.


찰나 같은 순간이었지만

내 감각과 생각은 길게 늘어났다.


마치 영화 속 슬로 모션처럼

사고의 순간 하나하나가

과도하게 또렷해졌다.


핸들이 헛돌았다.


사고가 났구나.

크게 났구나.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차가 멈추자

시간은 다시 평소의 속도로 돌아왔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보닛을 바라보며

차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은 다행히 열렸다.

한 발, 또 한 발, 차 밖으로 나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세요?”


폐차해야 할 정도로 부서진 차에서

사람이 살아 걸어 나왔다며

그들은 안도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화창한 가을날,

야외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에는 전혀 막히지 않던 길이

이상하게 정체되어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한가로이 밖을 내다보다가

SUV 한 대가 길 한가운데

비스듬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산산이 부서진 잔해들이

도로 위에 흩어져 있었다.


앞유리창은 깨져 있었고

길가에는 한 여자분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누군가는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지만

견인차도, 119 구급차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 메밀꽃 축제에 다녀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도 그 순간

시간을 길게 느꼈겠지.


즐거웠던 하루는

순식간에 다른 얼굴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유난히 느리게 흘렀을 것이다.





가끔 뉴스에서

사고 소식을 접한다.


타인에 의한 사고도,

스스로 저지른 사고도.


그럴 때마다

나는 사고 당시

내가 느꼈던 시간의 늘어짐을 떠올린다.


타인에게는

잠깐의 순간이었을 시간.


하지만 그 고통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느리게 흘렀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삶을 살아가다

뜻하지 않은 인생의 사고에

맞닥뜨렸을 때도

시간은 그렇게 느리게 흐른다.


영원히

그 시간 속에 갇혀버린 것처럼.


사고의 결과는

아무 일도 아닌 듯 지나갈 수도 있고

상처를 남긴 채 삶에 머물 수도 있으며

돌이킬 수 없는 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나의 태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