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로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된 이른 아침, 창 밖 도로에서 이상한 굉음이 들렸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지나가는지 베란다의 유리창이 떨렸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해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긴 포신을 앞세운 탱크들이 줄을 지어 가고 있었다. 너무나 신기해서 한참동안 구경했다. 실물 탱크를 본 건 처음이었으니 그럴 만 했다.
과연 강화도다 싶었다. 비로소 부모님이 강화로 이사를 하는 우리를 걱정한 까닭이 이해가 되었다. 북한과 가까워서 혹시 나라에 변고라도 나면 꼼짝없이 갖히는 건 아니냐고 걱정을 했었다.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웃어 넘겼는데, 탱크가 줄을 지어 가고 있는 광경을 보니 부모님이 걱정했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때는 민통선이란 이름도 신기했고 강화의 북쪽 마을에서는 북한이 손에 잡힐듯이 가까이 보여서 놀라웠다. 강화도와 황해도 사이를 갈라놓은 조강이 중립구역이란 점도 새로웠다. 휴전선은 알고 있엇지만 중립수역은 처음 들어봤다. 남한도 북한 영역도 아닌 중립이라니, 우리나라에 그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강화도는 지리적으로 북한과 가까이 위치해 있다. 그렇다 보니 안보상의 필요에 의해 북쪽의 해안가에는 끝없이 철책이 쳐져 있다. 또 군부대와 군사시설들도 곳곳에 들어서 있고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 역시 많다. 강화도 전역이 요새인 셈이다.
과거에도 강화도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강화도는 적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조정이 피난을 오던 곳이었다. 몽골이 침략했을 때 고려가 수도를 강화로 옮겨 39년간 지냈던 것이 그랬고 조선시대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난리를 피해 왕실이 피난을 왔다. 강화는 자연 조건 그 자체로 금성탕지(金城湯池)이자 보장지처(保藏之處)였다.
강화도를 중요시하면서 요새화 시킨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몽골은 주변 지역을 위협했다. 고려 역시 몽골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압록강 인근에서 피살되자 몽골은 이것을 기회로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는 대항하였으나 수도 개경이 포위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몽골과 화의를 한다.
몽골군이 철군하자 고려 조정은 장기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새로운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내성, 중성, 외성을 쌓았다. 고려 고종 24년(1237)에 외성을 쌓고 37년(1250)에 중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고종 22년(1235) 12월에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최우가 주와 현에서 공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징발해서 강화 연안의 제방을 더 높게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
몽골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에 쳐들어온다. 그러나 강화도에 있던 고려의 중심 세력들을 굴복시킬 수가 없었다. 고려는 강화에서 39년간 버티다가 몽골과 화의를 맺는다. 강화도가 눈엣가시처럼 생각이 되었던 몽골은지 화의의 조건으로 강화 천도 시절의 궁궐과 성들을 다 부수기를 요구했다.
적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고 쌓았던 성이었고 궁궐이었다. 몽골과의 화친 조건으로 부수겠다고 했지만 고려는 쉬이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몽골은 빨리 부수기를 독촉했다. 할 수 없어 고려는 몽골의 요구대로 강화도의 궁궐과 성들을 허물었다. 성을 허물어뜨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강화도는 전장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이 혼란스러워졌다. 성을 허무는 병사들의 한탄과 고통스런 울음 또한 그에 버금갈 만큼 컸다.
사적 제 452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강화 외성은 고려시대에 쌓은 성이다.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있는 외성은 길이가 약 12KM에 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외성은 흙으로 쌓은 성으로 길이가 약 3만7076척(약 12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했다. 외성은 고려시대에 쌓은 성이지만 몽골의 요구에 의해 파괴한 후로 흔적만 남아 있었던 것을 조선시대에 와서 다시 성을 쌓은 성이다.
조선의 숙종 임금은 강화도를 요새화 했다. 숙종은 강화의 해안을 따라 촘촘하게 52개의 돈대를 만들었다. 돈대는 바닷가 높은 곳에 있는 군 초소로 관측 및 방어를 위해 쌓은 소규모 성곽이다. 또 숙종 때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던 강화해협의 위쪽 적북돈대에서 아래쪽 초지돈대까지, 약 40리에 이르는 토성을 쌓았다. 고려시대의 외성을 다시 살린 셈이다.
강화 외성은 흙으로 쌓은 성이었다. 20여 KM에 이르는 길이의 외성을 쌓았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흙으로 쌓은 성인데다 해안을 따라가며 쌓았기 때문에 바닷물의 드나듬에 의해 유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돌로 다시 쌓았지만 그 역시 무너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연 앞에 인간은 무력한 존재였다. 그렇게 허물어지고 무너질 때마다 다시 쌓기를 반복하면서 강화 외성은 근세까지 내려왔다.
조선 영조 때 강화유수였던 김시혁은 외성을 벽돌을 이용한 전성으로 쌓자고 주장했다. 그래서 영조 19년인 1743년에 중국 연경의 전성을 모방하여 구운 벽돌로 외성을 쌓았다.벽돌을 이용한 외성의 개축공사는 1744년 7월에 끝났다. 그러나 다음 해의 장마 때 성곽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벽돌로 쌓은 전성 역시 자연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였음이 확인되었다. 무너진 곳을 다시 돌로 성을 쌓았다. 이후 강화 외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 구간과 돌로 쌓은 석성, 그리고 벽돌을 구워 쌓은 전성이 혼합된 상태로 남게 되었다.
외성의 유지와 보수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정조 3년인 1779년에 강화유수가 왕에게 보고한 내용 중에 이러한 고충이 담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벽돌로 쌓은 성은 곧 무너져 갑곶 주변의 수 리 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사옵니다. 그동안 벽돌을 돌로 바꾸어 쌓고 있는데 1년에 3백보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마다 이렇게 축조했지만 50리 중 겨우 그 절반을 축조했고 옥포의 석성은 또 무너졌사옵니다. 지금의 이 성역은 빙빙 도는 고리와 같아서 민력이 항상 수고롭기만 할 뿐 편할 날이 없습니다."
성을 쌓고 보수하는 공사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왕에게 이런 탄원을 했을까. 한 곳을 보수하면 또 다른 곳이 무너지고 허물어졌으니, 이는 마치 둥근 원을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이 끝이 없는 일이라고 했다. 백성들의 고충이 말할 수 없이 컸음은 자명한 일이었으리라.
불은면 오두돈대 근처에는 외성의 전성 구간이 일부 남아 있다. 구운 벽돌로 쌓은 전성인 이 외성 구간은 조선 영조 때 쌓았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수원의 화성을 벽돌로 쌓았다. 강화 외성을 벽돌로 쌓으면서 축적된 기술력이 바탕이 되어 50년 뒤 수원의 화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바닷물이 밀려들어오고 물러남에 따라 벽돌로 쌓은 전성도 견디지를 못하고 더러 허물어지고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성 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 덕분에 일부나마 남을 수 있었다. 나무는 자라면서 성의 벽돌들을 품어 버렸다. 마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유적을 보는 것 같다. 나무가 자라면서 석불을 품어 안은 것처럼 강화 외성의 나무들도 벽돌을 품에 안고 자랐다. 시간과 함께 벽돌은 나무와 한 몸이 되어 버렸다.
무너지고 허물어져 내리면 다시 쌓고 또 쌓았던 강화 외성이다. 그렇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800년 이상을 버티어 왔다. 강화 외성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기리고 보존할 가치가 충분한 역사 유적이다.
어찌 생각하면 강화는 우리나라를 지키는 제일선이었고 그 맨 앞에 외성이 있었다. 강화 외성은 강화를 지키는 데 끝나지 않고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방비책이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한 강화 외성이었다.
현대에도 외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현대의 외성은 흙이나 돌로 쌓지 않고 다른 것으로 가로 막는다. 철책이 바로 현대의 외성이다.
북한과 마주보고 있는 강화도 북단 해안가에는 철책이 끝없이 처져 있다. 과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외성이 지금은 대상이 북한으로 바뀌었 뿐이다. 형태와 대상만 바뀌었을 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은 변함이 없다. 외성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