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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숙 Oct 27. 2022

연미정(燕尾亭)의 밤 불빛

앞차가 속도를 줄입니다. 나도 따라서 속도를 줄이며 앞쪽을 살펴보니 군인들이 차량의 통행을 막았습니다. 얼마 안 있어 반대편 차로로 장갑차의 대열이 다가왔습니다.


장갑차에는 깃발을 들고 수신호를 하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바짝 긴장한 얼굴로 수신호를 하는 군인을 보니 예전에 아들을 군대에 보냈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내 고향 친구도 그 병사가 조카처럼 보이는지 애틋한 눈길로 한참을 바라봅니다.


친구는 민통선 안 마을에 가보고 싶어 했습니다. 강 건너 북한 땅이 궁금하다 했습니다. 그래서 양사면에 있는 평화전망대와 월곶리의 연미정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민통선 앞 검문소



연미정은 옛 사람들이 강화 8경으로 꼽았을 정도로 주변 경치가 뛰어납니다. 한강이 흘러내려오다가 연미정 앞에서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그 모양새가 꼭 제비꼬리와 닮아서 정자 이름이 연미정(燕尾亭)입니다.


연미정 앞은 바닷물과 민물이 들고나며 섞이는 곳입니다. 밀물이 들면 바닷물이 한강 하구로 올라가고 썰물이 지면 강물은 바다로 쏠려 나갑니다. 강이기도 하고 바다이기도 한 이곳을 강화도 사람들은 ‘조강(祖江)’이라 부릅니다.


연미정에서 바라본 조강과 북녘 땅




옛날에 조강은 고속도로였습니다. 충청도며 전라도 그리고 황해도에서 거둔 세곡이며 물자들이 조강을 타고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밀물 때를 기다리는 배들로 연미정 앞은 번잡했습니다. 그 근처 나루터는 지금의 고속도로 휴게소나 마찬가지였겠지요.


세곡(稅穀)은 한강이 얼어붙기 전에 서울로 운송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때문에 추수가 끝나고 부터 물이 얼기 전까지 강화 앞바다는 배들로 가득 찼습니다. 천 여 척의 배들이 밀물 때를 기다리며 한 나절 이상을 연미정 앞에서 정박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 광경이 실로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그때의 정경을 <<심도기행(沁都紀行)>>에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燕尾亭高二水中 연미정 높이 섰네 두 강물 사이에,
三南漕路檻前通 삼남지방 조운 길이 난간 앞에 통했었네.
浮浮千帆今何在 떠다니던 천 척의 배는 지금은 어디 있나,
想是我朝淳古風 생각건대 우리나라 순후한 풍속이었는데.


이 한시는 강화 불은면의 고재형이라는 선비가 1906년에 쓴 <연미조범(燕尾漕帆)>을 옮긴 것입니다. 연미조범이란 '연미정 조운선의 돛대'란 뜻으로, 충청, 전라, 황해도에서 올라오던 조운선들이 돛을 달고 연미정 앞을 경유하던 광경을 나타낸 것입니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황포돛배




선비가 심도기행을 썼던 1906년 당시에는 조운선이 폐지가 되어 볏 가마를 실은 천여척의 배들을 볼 수는 없었겠지만 서울과 강화를 이어주는 뱃길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강화도에서 서울까지 가자면 배가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이었을 것 같습니다.


배를 타고 서울로 오갔다니,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한강을 오르내리는 배를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에는 한강에 배들이 다녔습니다. 한강 하구는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던 배며 고기잡이배가 다니던 큰 물길이었습니다.


번잡했던 연미정 앞 바다는 지금 인적 하나 없습니다. 고적한 물 위로 가끔씩 새들만 날아다닙니다. 강둑에는 철책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두 길 가까이 높은 그 철책은 사람의 접근을 막습니다.


조강을 가운데 두고 강화도와 황해도가 마주보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은 채 2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쪽에서 소리쳐 부르면 저쪽에서 답이 날아올 것 같습니다. 이런 형편인데도 근 70년 동안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런 세월이 하도 오래 되다보니 이제는 강 건너 북녘이 우리 땅이라는 생각조차도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곳인데도 천리만리 먼 곳 같습니다.


연미정에서 바라본 밤 풍경. 불빛 환한 남쪽과는 달리 강 건너 북쪽에는 불빛 한 점 없다. 





낮 동안 내내 잠잠하던 조강은 밤이 되면 깨어납니다. 강을 따라 줄 지어 서있는 탐조등에 불이 켜집니다. 불빛은 육지를 비추지 않고 강을 향해 나아갑니다. 주황색 불빛이 어른대는 강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안개라도 낀 날이면 마치 꿈을 꾸기라도 하는 양 아련하게 빛납니다.


그런 날 밤에 경계를 서는 초병들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혹시 향수에 젖어 들지는 않을까요. 하지만 조강은 그런 감상조차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소리를 지르면 들릴 듯한 거리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적이 있는데 어찌 감상에 젖을 수 있겠습니까. 초병들은 밤새 강물을 바라보며 시대와 불화하는 우리의 현실을 속 깊이 느낄 뿐입니다.


스무 살 남짓의 청년들이 나라를 지킵니다. 그들의 청춘을 담보로 해서 우리는 일상의 평화를 누립니다.


숱한 젊은이들의 청춘이 저 조강과 함께 흘러갔습니다. 70년도 더 넘는 세월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조강은 말없이 흐를 뿐 대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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