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보장지처(保障之處) 강화도
추적추적 비가 옵니다. 벌써 여러 날 째 비가 오락가락 합니다. 장마가 시작 되었습니다. 이 우중에 이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당 있는 집을 찾아 강화도로 온 그이는 비를 맞으며 이사를 하는데도 행복한 가 봅니다. 그이의 목소리가 마당 건너까지 들려옵니다.
반려견을 마당에서 키우고 싶어 미화 씨는 강화로 이사를 왔습니다. 자연 속에서 자녀들을 양육하고 싶어 강화로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화로운 노년을 꿈꾸며 강화로 오는 은퇴 생활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강화로 삶의 거처를 옮긴 것은 분명 강화가 살기 좋은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지리책인 <택리지>에서 살기 좋은 곳을 택하는 데 있어 풍수학적인 지리(地理)와 생리(生理) 조건을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재물이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므로 기름진 땅이 첫째이고,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교류시킬 수 있는 곳이 다음이다."
즉, 넓은 들이 있어서 먹고살 걱정이 없는 곳이 살기에 첫째로 좋은 곳이고, 또 물자와 사람이 이동하기에 좋은 곳이 그다음이라는 말입니다. 농경사회였던 과거에는 농사가 잘 되는 넓은 들이 있는 곳이 최고로 살기 좋은 곳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강화도만큼 살기 좋은 곳이 또 있을까요.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입니다. 바다를 메워 만든 들은 매우 넓어서 가구당 경작하는 토지 역시 많습니다. 그래서 "한 해 농사지으면 10년은 먹고 살 수 있다"라는 말이 예로부터 전해질 정도입니다. 또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이 한데 모여 바다로 흐르는 곳이므로 어족이 풍부해 바다 농사도 잘됩니다. 그러니 <택리지> 식으로 보자면 먹을 게 많이 나오는 강화는 살기에 좋은 곳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고려는 강화도를 선택합니다. 강화는 들이 넓어 먹고 살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개경에서도 가깝습니다. 또 ‘섬’이어서 적으로부터 보호해주기까지 하니 고려는 여몽전쟁 때 강화로 천도를 하고 39년간 버팁니다.
지도상에서 강화도를 보면 둥글고 약간 길쭉하게 생긴 고구마를 닮았습니다. 해안선은 굴곡진 곳이 없이 미끈하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김포 반도와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깝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거리가 저렇게 가까운데도 여몽전쟁 때 몽골이 바다를 건너지 못한 것을 의아하게 여깁니다.
천혜의 요새, 강화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강화도는 고려시대의 강화도와는 많이 다릅니다. 지금의 강화도는 오랜 세월 동안 바다를 메운 간척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땅입니다.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던 13세기의 강화도는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마니산이 있는 화도면도 당시에는 '고가도'라고 불리는 섬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여러 섬들이 강화 본도에 올망졸망 포도 알맹이처럼 달려 있었습니다.
강화와 김포 사이의 강화해협을 비롯해서 강화도와 석모도, 그리고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의 바다는 물살이 매우 셉니다. 물이 밀려올 때나 썰물에 물이 빠져나갈 때면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세찬 물소리에 오금이 저릴 정도입니다.
밀물과 썰물이 들고날 때의 물의 높낮이 차이도 많이 납니다. 만약 썰물 때 모르고 배를 몰 경우에는 수위가 낮아져 드러난 암초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강화 바닷가는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갯벌이 드넓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강화 앞바다의 이러한 점 때문에 강화는 천혜의 요새(要塞)였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위기에 처하자 강화도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고려의 실권자였던 최우에게 강화도를 권한 사람은 황해도 풍덕군(지금의 개풍군)의 승천부 부사 윤린이었습니다.
"강화는 가히 난(亂)을 피할 만합니다."
윤린의 말을 듣고 최우는 강화로의 천도를 결심합니다. 하지만 반대도 만만찮았습니다. 태조 임금(왕건)부터 시작해 200년을 이어온 개경을 두고 강화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선뜻 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우는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고종에게 강화로의 천도를 종용했고, 마침내 1232년 7월에 결행합니다.
개경에서 강화로, 장마철에 오다
우리나라는 여름에 집중호우가 내립니다. 800년 전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장마철인 7월에 움직였으니 도중에 애로가 많았을 것은 안 봐도 훤히 알 수 있습니다. 몽골군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길을 나섰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근 열흘간 비가 온 뒤라서 길은 온통 진창이었습니다. 진흙탕 길에 미끄러지고 자빠져서 행렬은 이리저리 뒤엉켰습니다. <고려사>에는 그 당시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천도하니 때마침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돼 정강이까지 진흙에 빠졌다. 사람과 말이 엎어지고 넘어졌다. 벼슬아치와 양가(良家)의 부녀들도 신발을 벗고 갈 지경이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은 갈 바를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한꺼번에 사람들이 움직였으니 어찌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정강이까지 빠지는 진흙탕을 걷느라 넘어지고 자빠지고 엎어졌을 겁니다. 또 바다를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을 것입니다. 어미를 잃고 울부짖는 어린 아이들과 자식을 찾아 헤매는 부모들, 다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로 강화로 오는 길은 아비규환의 또 다른 전장(戰場)이었을 듯합니다.
중국의 <송사>(宋史)에는 고려의 총 인구수를 "남녀이백십만구(男女二百十萬口)"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호구조사는 역(役), 즉 군역이나 부역의 부과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이나 노인들은 호구조사에서 제외가 됐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 인구는 이보다 더 많았을 거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수도인 개경에는 30만에서 50만 가까이의 사람이 살았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의 유럽 도시들은 인구가 몇 만 명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개경이 얼마나 큰 도시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대 도시 강화도
그 많은 개경 사람들이 강화도로 왔습니다. 천도 시기의 강화 인구가 삼십만 명 가까이 되었다니, 강화는 졸지에 거대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궁궐이 세워지고 성도 쌓았습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내성과 중성 그리고 외성까지 쌓았으니 강화는 그야말로 철옹성이 되었습니다.
강화도는 동서 12km, 남북 약 28km, 총 넓이는 약 300㎢인 섬입니다. 제주도와 거제도 그리고 진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논이 넓어 쌀 생산량도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큰 섬이 아니었습니다.
고려 천도 시기의 강화도는 지금처럼 하나의 섬이 아니고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수십만 명의 사람이 몰려들었으니 집들도 다닥다닥 붙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불도 자주 났다고 합니다. <고려사절요>에는 강화에 불이 나 집이 다 탔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1234년) 정월에 큰바람이 불고, 대궐 남쪽 동네 수천 호의 집이 불에 탔다.
(1245년) 3월에 강도(江都, 강화도)의 견자산(見子山) 북쪽 민가 800여 호가 불이 나서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고, 연경궁까지 탔다.
불이 자주 나서 궁궐까지 타는 일이 발생하자 근처의 민가들을 헐어서 화재로부터 궁궐을 보호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엉켜 살아 화재로 집이 다 타고 궁궐까지 탔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강화로 온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몽골과 화친을 맺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갈 때까지 강화는 장장 39년 동안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강화에서 나라의 맥을 지켰으니 고려의 강화 천도는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살기 좋은 곳, 강화
도시는 날로 팽창하지만 시골은 하루가 다르게 쇠락해갑니다. 청장년들은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이 시골을 지킵니다. 총 인구가 3만~4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군(郡)도 전국에 많습니다. 대부분의 군 단위 지역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과는 달리 강화는 인구가 늘어납니다. 현재 강화군의 총 인구는 약 7만 명에 육박합니다. 강화가 좋아 이사를 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살기에 좋은 곳은 어떤 곳일까요.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들이 넓고 교통이 좋은 곳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시대에 비춰 보면 일자리가 많고 도로나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 이동하기에 좋은 곳이 그런 곳일 테지요. 강화는 어떨까요. 살기에 좋은 곳일까요. 아니면 여타의 농어산촌 마을들처럼 젊은이들은 떠나고 노령층만 남는 곳일까요.
‘비가 오는 날 이사를 하면 잘 산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장마철에 이사를 한 미화 씨에게도 이 속설은 통합니다. 이사하는 날 비가 왔으니 미화 씨의 강화 생활은 탄탄대로일 것입니다. 미화 씨가 품은 꿈을 펼치며 평화롭게 잘 살기를 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