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읍내는 어디건 땅을 파면 옛날 유물들이 나온대. 그래서 큰 건물을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대.”
“맞아. 강화도가 고려시대 때 39년간 수도였으니 땅을 파면 고려청자도 나오겠다.”
고려의 궁궐터라고 해서 일부러 왔는데 볼 게 별로 없어 내심 실망을 하던 사람들이 ‘고려청자’라는 한마디에 귀를 쫑긋 기울이며 솔깃해한다. 운이 좋으면 청자 파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싶은지 다들 땅바닥을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땅을 파면 고려청자가 나온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 그곳은 바로 강화도다. 강화도가 어떤 곳이기에 땅 속에서 유물들이 나오는 것일까. 고려궁지에서 고려시대(918년~1392년)를 상상으로 그려 본다.
땅을 파면 고려청자가 나온다고?
역사 이래로 한반도에서 도읍지였던 곳은 여러 군데가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의 경주를 비롯해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과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이 그 대표적인 도읍지다. 그리고 또 한 군데가 더 있으니 강화도가 그곳이다.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천도했던 시절의 강도경(江都京) 역시 한반도 통일 국가의 수도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231년 몽골의 1차 침략 때 큰 피해를 입었던 고려는 이듬해 여름에 강화로 수도를 옮긴다. 그리고 이후 39년간 강화에서 머물며 나라의 본체(本體)를 지켰다. 고려는 개경에서와 똑같은 궁궐을 강화에 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 사적 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려궁지’다.
사실 고려궁지는 볼 게 별로 없다. 아니 볼거리는 많지만 고려궁궐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볼거리가 그다지 없다. 고려 궁궐터라고 해서 대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터도 넓지 않다. “애걔, 이게 무슨 궁궐터야? 뭐가 이리 작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고려궁지는 아직 그 전모가 다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처럼 강화에서의 고려, 즉 강도(江都) 시절의 고려는 연구해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다. 마치 땅을 파면 불쑥 고려청자가 나올지도 모르는 것처럼 강화도 시절의 고려 역시 파고 들어갈 부분이 많다.
고려 왕조는 개경에 도읍을 정하고 송악산 남쪽 기슭에 정궁인 만월대를 두었다. 그 외 서경인 평양과 남경인 서울에도 이궁을 두었다. 이궁이란 정궁 이외의 궁궐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 청와대 자리에 고려의 이궁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사절요>에서 본 강화의 고려궁궐
강화도에 있었던 고려 궁은 평양이나 서울의 이궁과 달리 정궁이었다. 강화도는 고려가 39년간이나 머물렀던 수도였으니 궁궐 역시 개성의 정궁에 버금갈 만큼 잘 지었을 것이다. <고려사절요>의 고종 편을 보면 “(당시 실력자였던) 최우가 이령군(二領軍)을 보내어 강화에 궁궐을 창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화로 천도하기 전에 이미 군사 2,000명을 보내어 궁궐을 짓기 시작했고, 이후 몇 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궁궐이니 당연히 전각들도 많았을 것이다. 개성의 정궁을 본 따서 건물을 지어 이름까지도 똑같이 붙였을 뿐만 아니라 궁궐 뒤의 산도 개성의 송악산과 같은 이름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 강화는 ‘작은 개경’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고려궁지에는 고려시대의 건축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 있는 건물들은 조선시대 지방 관청인 이방청 등일 뿐 고려시대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고려를 증명해줄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왔던 사람들은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궁궐터까지도 비좁고 옹색하기 짝이 없으니 도대체 무엇을 보고 여기를 고려의 궁궐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지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고려궁지는 강화읍의 뒷산격인 북산의 중턱쯤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과 물자들이 많이 드나들었을 궁궐을 왜 이런 언덕바지에 지었을까. 평지를 놔두고 이런 곳에 자리한 까닭이라도 특별히 있는 것인지 짐짓 궁금증까지 든다.
강도(江都)의 궁궐 자리라고 알려져 있는 현재의 고려궁지에서는 여러 번의 발굴 조사에서도 궁궐이라고 내세울 만한 특별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그 궁궐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개성의 정궁을 본 따서 지었다는 그 화려한 궁궐들이 대체 있기는 있었던 것일까.
고려궁지 뿐만 아니라 궁골까지도...
고려궁지 아래에는 ‘궁골(宮谷)’이라 불리는 동네가 있다. 궁골은 곧 궁궐이 있던 동네라는 뜻이니 그 일대도 모두 고려의 왕궁이 있던 곳은 아니었을까. 사적 제 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려궁지뿐만 아니라 궁골과 그 인근 일대가 다 고려의 궁궐이 있었던 자리라고 생각을 하면 고려사에 기록이 되어 있는 장대한 고려궁궐이 눈앞에 그려진다.
고려궁지 동남쪽에는‘내수골’로 불리는 동네도 있다. 내수(內豎)는 고려 시대에 궁중에서 임금의 시중을 들거나 숙직 따위의 일을 맡아보는 벼슬아치를 이르던 말이다. 권문세가의 자제나 시문과 경문에 능통한 문과 출신이 주로 내수에 임명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내수들이 살던 곳이라고 해서 동네 이름이 ‘내수골’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또 당시 실권자였던 최우의 저택도 고려궁지에서 동쪽 방향, 현재의 강화중학교 인근일 것이라고 하니 지금의 강화읍 요지에는 왕과 실력자들이 모여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강화읍에는 고려와 연관이 있는 지명들이 더러 있다. 고려궁지에 고려를 나타내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사실 강화 자체가 고려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마모되고 유실이 되어서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지 한 겹만 파고 들어가면 고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강화가 고려의 수도였던 강도(江都) 시절에 대한 자료는 매우 부족하다고 한다. 때문에 그동안의 연구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근 수년간에 걸쳐 강화읍 일대를 중심으로 강도시대와 관련된 유적의 조사가 증가하면서 강도 연구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고 있으니 앞으로 더 진전된 연구 결과들이 나올 것이다.
강화가 고려를 증언한다
본래 궁궐 담 근처에는 큰 나무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혹시 나쁜 뜻을 품은 자들이 나무를 의지해서 대궐의 담장을 넘는 경우를 경계한 것이기도 하며 또 자객이 나무그늘에 숨어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궁궐 담장 안에는 큰 나무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 궁궐 문 앞에 나무가 있으면 ‘한가로울 한(閑)’자 모양이 되어 나라가 번창할 수 없다고 여겼으며, 또 담장 안쪽에 나무가 있으면 ‘곤란할 곤(困)’자가 되므로 궁궐에는 후원 이외에는 나무를 잘 심지 않았다.
그런데 예외인 나무가 있었으니 바로 홰나무라고도 불리는 회화나무가 그것이다.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서술해놓은 주례(周禮)에 의하면 회화나무는 삼공(三公) 즉 삼정승이 앉는 자리를 뜻한다. 그러니까 회화나무는 조정을 상징하는 나무인 셈이다. 회화나무가 있다는 것은 그곳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고려궁지의 서쪽 담장 곁에는 기품이 있어 보이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향해 굳건히 서있다. 이 나무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혹시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나무는 아니었을까. 회화나무인 걸로 봐서 궁궐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아 찾아보니 수령이 4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만약 이 나무가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나무라면 고려를 증언해 줄 텐데,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친 김에 고려궁지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고려의 흔적을 찾아서 이곳저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고려궁지와 맞닿아있는 뒷산에도 올라가 보았다. 고려 천도 시절, 송악산이라고 불리었던 바로 그 산이다. 조심스레 땅을 살펴보았다. 기와의 파편들이 더러 보였다. 고려궁지 발굴 조사 때 나온 듯한 돌무더기도 보였다.
고려궁지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강화읍 전체를 다 조사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빈 터로 남아있으면 모를까 오랜 세월 사람들이 살아왔고 또 현재에도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곳을 발굴 조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으로만 그때의 고려 수도인 강화를 그려볼 수밖에 없다.
고려가 천도를 했던 당시의 강화에는 30만 명도 넘는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몰려와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강화도의 어디 한군데도 빈 곳이 없이 다 집들이 들어섰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대단하다. 남북한 합해 총 인구가 8천만 명에 달하는 현재에 봐도 30만 명이라면 엄청난데 총 인구가 400만 명 남짓이었다고 추정되는 고려시대에 30만 명이 몰려와서 살았다니 정말 놀랍기 짝이 없다.
고려시대 최고의 볼거리는 팔관회와 격구였다. 격구란 무신들이 무예를 익히는 방법으로 행하는 놀이를 이르던 말인데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막대기로 공을 치던 격렬한 운동이었다. 강화도 시절에도 격구를 했을 터이니, 그렇다면 격구장은 또 어디쯤에 있었을까. 말을 타고 하던 경기였으니 경기장 역시 상당히 넓고 컸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해나가다 보니 강화읍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고려가 우리를 부른다
고려시대를 그려보면서 강화 읍내를 돌아보면 참으로 볼거리가 많다.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어떤 건물이 서있었을까 등등을 상상하면서 강화 읍내를 둘러보면 눈에 보이는 그 너머로 또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고려궁지의 뒷산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소복이 쌓인 낙엽더미를 헤치며 새 싹들이 나올 준비를 하고 있고 생강나무의 꽃눈도 봉긋 부풀고 있었다. 아직 봄이 오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결에는 봄기운이 실려 있는 듯했다.
고려의 고종 임금님은 강화에서 스무 해도 더 넘게 봄을 맞이했다. 그때도 햇살은 지금과 똑같이 따뜻하게 비췄을 것이고 바람 역시 숲 사이를 훑고 지나갔을 것이다. 고려궁지에 고려 궁궐은 없지만 햇살과 바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역사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마음의 눈으로 고려 천도 시절을 그리면 어느새 우리 눈앞에는 고려의 장대한 궁궐과 그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소박하고 아담한 강화읍이 강도(江都)시대에는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간 수도였다는 것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보니 어째 가슴이 설레어 온다. 고려가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