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의 길로 들어서다
꿀벌은 겨울잠을 잡니다. 아니, 잠을 자는 게 아니라 겨울에는 바깥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벌들이 활동하지 않는 겨울은 벌치기들에게 방학입니다.
퇴직을 한 그해, 2017년 11월 중순에 벌들을 잠 재우고 우리 부부는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났어요. 베트남의 고원도시인 '달랏'이라는 곳에 가서 겨울 동안 지냈습니다.
베트남은 오토바이 세상입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오토바이를 탄 그들은 신묘한 솜씨로 오토바이를 탑니다. 출퇴근 시간대 도로에는 빽빽하게 오토바이 물결이 흘러가지만 서로 충돌하거나 그런 일은 잘 볼 수 없답니다.
▲ 베트남의 "달랏"은 프랑스풍 건물이 아기자기하게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우리도 오토바이를 빌려서 타고 다녔어요. 처음에는 도저히 그 물결 속으로 들어갈 엄두가 안 났지만 타다 보니 요령을 터득했어요. 그래서 복잡한 도로에서도 현지인들처럼 잘 타고 다녔답니다. 물론 오토바이는 진운(남편)이 운전했고 저는 진운의 허리를 꽉 붙잡고 뒷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말이에요.
오토바이가 있자 못 갈 곳이 없었어요. 오토바이는 시간과 공간을 확장해 주었어요. 달랏에서 지냈던 두 달 동안 안 가본 곳이 없었을 정도로 우리는 온 사방을 돌아다녔답니다. 두세 시간 정도 달려가야 하는 이웃 도시로도 여행을 갔어요. 그렇게 마음껏 돌아다니며 지내다 이듬해 이른 봄에 한국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벌을 치고 돌보는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대개 벌치기들은 한낮에는 일을 하지 않아요. 더워지기 전에 일을 하고 한낮에는 쉬었다가 해가 설핏 질 때 양봉장으로 가서 또 벌을 살펴요. 한낮에 방충복을 입고 일하자면 무덥기가 한량없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일을 하지 않고 쉬는 거지요.
▲ 벌에게 쏘이지 않기 위해 방충복을 입고 벌을 살핀다.
진운은 학교를 퇴직 했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가벼이 보내지 않았어요. 스스로 정한 루틴대로 하루를 꾸몄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오전 9시 정도까지 일한 뒤 집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켜고 류현진 선수가 활약하는 미국 야구 중계를 봤어요.
진운은 자신의 삶에 만족했습니다.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꼭 한 가지만은 얻고 싶었어요. 오토바이였습니다. 베트남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훈풍을 가르며 달렸던 날들이 떠올랐어요. 그럴 때마다 컴퓨터 화면에 오토바이 사진을 띄워 놓고 들여다봤습니다. 진운은 그 오토바이를 살 생각이었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나라 곳곳을 둘러봐야지 했습니다.
▲ 베트남 나트랑.
하지만 문제는 주변의 걱정이었어요. 딸과 아들은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마음을 두고 있는 걸 알고 극구 말렸습니다.
"아버지, 오토바이는 위험해요. 오토바이는 외국 나가서 타시고 한국에서는 타지 마세요."
아이들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다들 말렸습니다. 진운은 고민 했습니다. 오토바이를 살 것인가 아니면 주변의 말을 듣고 그만둘 것인가.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반대가 있더라도 내 생각을 믿고 실행하면 되지 그것 가지고 뭘 그렇게 고민을 하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진운 역시 오토바이를 사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모르게 진운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뉴스에서 본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 식량난으로 고통 받는 북한을 돕기 위한 옥수수 보내기 운동.
2019년 5월, 세계식량기구(WHO)는 북한의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에 대해 말했습니다. 춘궁기인 봄에 벌써 식량이 바닥이 나서 추수를 할 때까지 북한 주민들의 고통이 예상된다는 뉴스였습니다.
진운은 오토바이를 사려고 모아두었던 돈을 북한돕기에 내놓았습니다. 옥수수 5톤을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또 돈을 모았습니다. 400CC급 중고 오토바이를 봐놓고 착실히 돈을 모았는데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게 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아들이 진운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모태솔로였던 아들이 드디어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차가 필요했는지 아들은 차를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한시라도 빨리 차를 사고 싶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지원을 요청했답니다. 봐둔 차를 같이 좀 알아봐줬으면 하는 부탁이었으니, 돈 보태달라는 소리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부모 마음은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진운은 흔쾌히 오토바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오토바이 살 돈을 아들에게로 돌렸습니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내는 지인이 그랬습니다.
"김 선생님, 오토바이 대신 승마는 어떨까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겁니다."
▲ 화살에 줄을 매어 활을 쏘는 "주살", 활쏘기의 기본자세를 익히기 위한 연습 과정이다.
그 순간 진운은 한 줄기 빛을 보았습니다.
'그래,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거야. 고구려 무사들처럼 말야. 오토바이 대신 말이구나.'
비로소 진운은 오토바이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무사의 세계로 들어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