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인문학 발견
평화로운 오전 시간이었다. 도우미 이모님 3종 세트인 세탁기,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를 부랴부랴 돌려놓고, 우아하게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면서 우아하게 독서나 좀 해볼까 결심하던, 인생 나쁘지 않네 하던 순간에, 핸드폰 화면에 1541이 떴다.
이런. 지금은 오전 11시. 이 시간에?
“엄마, 나 배움공책 안 가져왔어.”
오늘, 인생 나쁘지 않기는 틀렸다. 서둘러 검정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잰걸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잠깐, 우리 첫째가 몇 반이더라? 4반? 그건 둘째네 반이었던가? 꼭 중요한 순간에 발동하는 나의 건망증. 아, 8반이다. 배움공책 잊어버렸다고 잔소리 하려고 했는데 어쩌겠어, 나도 이렇게 잊어버리는걸. 첫째에게 잔소리하기 전, 나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어쨌든 오늘의 임무 완료. 집에 와서 한숨 돌리고, 독서를 해볼까 했던 나의 고상스러운 생각은 갑작스런 노동에 대한 보상심리로 유튜브가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았고, 그렇게 나의 평화로운 오전이 증발했다.
아차, 둘째가 오늘 핫도그 먹고 싶다고 했었지. 핸드폰을 1시간 30분이나 부여잡고 깔깔 웃다가, 눈물이 고이기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10살이 된 둘째는 요새 부쩍 배고파를 입에 달고 살았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먹을 걸 찾고, 하교 후 집에 들어오면서 배고파를 연발했다. 그 아이는 30분만에 오롯이 소화를 다 시키는 소화능력자였다. 치즈와 소시지가 절반씩 들어있는 반반 핫도그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을 녀석을 생각하며 설탕은 조금만 뭍여 주세요 전화 주문을 했다.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핫도그를 찾아 들어오는 길에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1541.
“엄마, 나 영어학원 숙제 안 갖고 왔어.”
아우. 속에서 천둥이 울렸다. 아까 전화했을 때 말해주면 좀 좋아. 그래 그때는 생각이 안 났겠지. 지금이라도 생각 난 게 다행이야. 평화주의자인 나는 긍정 자아를 억지로 끌고 와본다. 이놈의 모자를 몇번을 썼다 벗었다 하는 건지. 나의 우아한 하루는 온데 간데 없고, 애 전화에 왔다 갔다 하는 탁구공이 된 기분이었다. 엄마는 극한직업이야.
"우리 딸 얼굴 한번 더 보고, 아이구 행복해"
씨익. 나는 미안함과 못마땅함이 뒤섞인 표정을 한 첫째에게 거짓이 조금 섞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눈치 빠른 첫째는 나의 표정에서 그런것들을 다 읽어냈을 테지만, 어쩔 수 없다. 집에 와 마주한 식탁엔 텅 빈 접시뿐이었다. 둘째가 집에 왔다가 남의 것인 줄 의심도 않고, 게눈 감추듯 핫도그를 홀랑 먹어버리고 그 잔해와 흔적만 남겨놓은 것이었다. 재빠르게 먹고 엄마 얼굴 볼 새도 없이 후다닥 학원으로 가버린 둘째. 핫도그를 한입 베어물고 슬며시 눈을 감고 흐음 하며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을 둘째의 얼굴을 못 본 것이 에미는 참 아쉬웠다.
오늘 저녁은 뭘 먹나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어제 사다놓은 콩나물 해장국이 눈에 띈다. 달걀프라이를 더한 완벽한 저녁식사 계획에 기분이 좋아졌다. 인생 나쁘지 않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살만하다 아니다를 반복하고 있는 나는 그냥 이것이 인생이지 하고 말았다. 해야하는 집안일이 눈에 띄었다. 일단 빨래를 좀 개고, 물때가 보이기 시작한한 화장실을 청소한 다음, 밥을 안치자. 분리수거도 해야 하는데 그건 내일할까 고민을 빙자한 미룸을 계획했다. 나의 체력은 한계가 있으므로.
둘째가 돌아왔다. 붉다. 입 주변이 영 붉다. 그것이다. 설곤약.
요즘 학교 앞 무인 문구점은 설곤약에 빠진 초등학생들로 붐빈다. 나의 자랑스럽고 영민한 둘째는 이런 트렌드한 아이템을 놓치는 법이 없다. 매운맛이 나는 벌건 그것을 스읍스읍하면서도 잘도 먹어댔다. 그걸 그리 달게 먹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측은한 마음도 든다. 종일 배우는 삶. 학교에서 실컷 배웠는데, 학원에서 또 한참 더 배운다. 배움의 참된 기쁨을 만끽하기엔 너무 어리고, 너무 많이 배우는 인생이다.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리라. 아이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배움과 배움 사이의 작은 틈 사이로 맵고 붉은 것 한 조각을 찾아낸 것일터. 순간 아이의 눈이 생선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반짝하고 빛났을 모습을 상상하다 씨익 웃었다. 그 미소가 가시기 전, 혀를 반으로 접어 묻는다.
“우이구, 그게 그렇게 맛있었쪄?
"엄마, 나랑 오목 하자."
아직 나를 한번도 못 이겨본 초보오목선수는 오늘도 고수인 나에게 들이댄다. 귀엽다. 그렇다고 봐주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엄마를 뛰어넘어 엄마가 한번만 봐달라고 절절 매는 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그날을 기다린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가 말씀하셨다. 자식이 부모를 뛰어넘는 것이 최고의 효도라고. 아들, 오목으로 엄마를 뛰어넘어 효도를 선사하거라.
"엄마, 밖에 나가고 싶어."
누나가 학원에 가고 엄마를 독차지 할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참 계획적인 둘째다. 필수품 모자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알록달록 오색빛깔 낙엽이 떨어진 거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은 가을이야. 둘째는 가을을 오롯이 느끼고 싶은지 낙엽을 슬며시 밟아본다. 바스락. 음, 날씨가 건조하네. 건조한 가을길을 걸으며 산책과 수다가 이어졌다. 주로 게임 이야기라 나는 잘 모르지만 대단한 이야기를 듣는양 귀를 기울였다. 둘째가 언제까지 나한테 산책을 하자고 할까?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인지 슬쩍 쓸쓸해지는 느낌이었다.
첫째가 학원에서 올 시간이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해가 짧아져 금세 어둠이 내려앉았다. 학원에서 씨름했을 아이를 생각하며 마중을 나갔다. 횡단보도에서 아이돌 춤을 추고 있는 K초딩. 틀림없는 내 아이. 나를 발견하고 그 긴 횡단보도를 전력질주로 달려와 나에게 폭삭 안겼다. 첫째는 3일은 굶은것마냥 허겁지겁 저녁식사를 하면서 1교시부터 뭐했는지 줄줄이 읊어댔다. 식사는 진즉 끝났는데 아직도 5교시가 진행중이다. 하루종일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지 않고 엄마인 나에게 들려주는 첫째. 정말 고맙다. 그렇지만, 나는 설거지도 해야 하고 못 다 갠 빨래도 개야 하고, 너는 목욕도 해야 하고 숙제도 해야 하지 않겠니? 그러다 문득, 이런 재잘거림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어머, 정말?, 진짜?, 우와. 맞장구쳐준다.
서둘러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간단하게 숙제 여부를 확인하고 집안의 조명을 낮췄다. 잠자리 독서로 아이들을 재워주고 나오면 맥주 한잔이 간절한 나만의 시간이 된다. 의사들이 하루에 5천보만 걸어도 좋다고 하는데 아이 덕분에 8천보를 걸어 건강에 더 도움이 되었고, 아이는 엄마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 덕분에 나의 오목 실력이 향상되고, 아이는 엄마를 이겨보려 매일 같이 도전하는 삶을 산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따뜻한 저녁밥상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잠자리 독서로 내일의 희망을 비축한다. 아이도 크고 엄마도 크는중이다. 매일매일 인문학을 발견하는 감사한 하루를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