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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통 중에 생각 난 그 빵

죽기 전날, 마지막 빵

by 온리

출산예정일 새벽 5시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주르륵 따끈하게 흐르는 느낌은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여보, 양수가 흐르는 것 같아."

출산에 대해 많이 상상해 봤지만 막상 그날이 되고 보니 심장이 터질 듯 굉장히 떨렸다. 마음을 가다듬고 미리 준비해 둔 출산 가방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 아가 만나시죠."

산부인과 의사가 선고하듯 말했다. 오늘이 예정일이고 몸의 변화도 있으니 예상은 했지만 의사의 말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임신을 계획할 때부터 당연히 출산을 염두에 두었는데도 머리가 먹먹해졌다. 내가 이 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아기를 잘 만날 수 있을까? 잘 안 되면 어떡하지? 엄마는 어떻게 이런 일을 여러 번 견뎌냈지? 엄마 나 너무 무서워. 초산의 임산부는 거대하게 밀려오는 두려움의 파도에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진통이 발끝도 내밀기 전인데 눈물부터 흘리고 있는 이 애기엄마를 어떡하나. 진정하자. 지금 나는 아기를 낳아야 한다. 의사 선생님들이 잘 도와주실 거다. 그리고 지금 가장 의지하게 되는 우리 남편.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나 잘할 수 있겠지? 눈빛으로 나에게 용기를 좀 달라고 애원했다.


입원실에 누워서 주삿바늘을 연결하고 유도분만제를 맞았다. 그리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서 허리에 무통주사도 맞았다. 이렇게 내 몸에 두 가지의 든든한 도우미가 들어왔다. 유도분만제는 아기야 이제 나갈 시간이야 라는 속삭임으로 분만을 도울 것이고, 무통주사는 나의 고통을 10분의 1로 줄여서 출산이 너무 힘들지 않게 도울 것이다. 할 수 있다는 다짐과 불안한 마음이 공존하는 가운데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떠오르는 복잡한 생각들을 억지로 누르며 아기에게 전달되지 않게 머리를 흔들었다. 집중하자, 우리 아기한테. 출산을 하기 위한 의례적인 절차들을 진행한 후에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었다. 습습후, 습습후, 간호사를 따라 호흡을 하며 예쁜 아기를 만날 생각만 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 아기 잘 만나게 해 주세요.


"4센티 열렸네요."

4센티 열리면 다 열린 거랬는데, 이제 곧 나오는 건가? 하지만 나의 진통이 뭔가 애매했다. 아프기는 아픈데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만큼의 진통은 아닌 듯했고 뭔가 나오고 있다는 느낌도 없다. 몇십 분에 한 번씩 의사가 와서 내진을 했지만 그때마다 나의 자궁문은 4센티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미미하던 진통조차 사그라들고 졸음이 밀려왔다. 선생님께 졸리다고 했더니 졸리면 자라고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서 다시 내진을 했는데 아직도 4센티란다. 10센티가 열려야 애가 나오는데 진통을 몇 시간을 했어도 왜 아직 4센티란 말인가. 내가 잠을 자서 그런가?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 다시 불안이 엄습해 왔다.


불안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와중에 나는 어떤 이미지를 하나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단단하면서도 폭신했다. 동그랑 모양 두 개가 포개어지고 그 사이 연한 핑크빛의 달콤함이 머무르는. 달큼한 향이 회오리치듯 밀려왔다가 탁 하고 상큼함이 온몸에 퍼지는 신기루 같은 형상이 보였다. 어쩌면 이건 출산에 대한 이미지인지도 몰랐다. 거친 진통의 숨결은 아기에게 부드럽게 다가가 아기를 슬며시 밀어주고, 동그란 모양 두 개는 엄마와 아기를 상징하며 연한 핑크빛은 둘을 하나로 이어주는 탯줄 아닐까. 아기를 낳고 품에 안으면 나의 출산은 고통 대신 사랑 가득한 달콤함으로 느껴질 것이다. 아이가 응애 울면 나의 코는 상큼한 레몬향을 맡은 듯 찡하여 곧 온몸에 전율을 맛보게 될 것 같았다. 어서 만나자, 우리 아가.


아기를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고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었다. 아프다. 진짜 아프다. 숨이 안 쉬어진다. 무통천국이 끝난 걸까. 다시 내진을 했다. 4센티. 4센티의 지옥에 갇혔다. 남편을 보며 울부짖었다. 나 좀 살려달라고. 의사가 아기는 다 내려왔는데 자궁문이 안 열려서 아기도 힘들어한다고 했다. 나도 힘든데 아기도 힘들다니 제왕절개 수술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급하게 동의서에 사인을 했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마취에서 깨어나 아기가 건강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놓았다. 정말 목숨을 건 출산이었다.


곧 남편이 아기를 병실로 데려와 누워있는 나에게 안겨주었다. 작았다. 너무나도 작고 여렸다. 그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있는 게 신기했다. 빨간 핏줄들이 아기의 용씀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아가야 부르니 상큼한 전율과 함께 눈물이 났다.

"여보, 나 먹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말만 해. 다 사다 줄게."

"보름달빵."

출산 중 떠올랐던 이미지는 보름달빵이었다. 어렸을 적 나는 배가 자주 아팠다. 밥도 못 먹고 쫄쫄 굶고 있을 때 할머니가 나한테만 주셨던 보름달빵이다. 나는 덥석 베어 물지도 못하고 한 꼬집씩 입 안에 넣어 사르르 녹여먹곤 했었다. 약간의 바삭함과 달콤함 그리고 부드러움. 그렇게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었던 보름달빵을 산통 중에 떠올린 것으로 보아 할머니가 이번에도 나와 아기를 살려주신 것 같다.


퇴원 후 남편이 보름달 빵을 사 왔다. 이제 막 태어난 우리 아기의 볼처럼 부드럽고 촉촉했다. 그리고 할머니 생각이 물씬 났다. 할머니 고마워요.


스크린샷 2024-11-27 124341.png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마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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